part 1. 굴러오는 돌 혼자가 된 것은 열여섯 살 여름, 소나기가 한창이던 7월말이었다. 무덥고 눅눅한 공기가 폐에 꽉 차 불쾌지수가 최고조였던 여름 뺑소니 사건으로 지무는 고아가 됐다. 원래 가난한 집이었다. 단칸방 월세였고, 중졸인 부모님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없이 노가다를 뛰셨다. 아버지는 공사판, 어머니는 파출부. 그러면서 별로 똑똑하지 못한 아들 하나만 바라봤다. 그들이 싫었다. 지긋지긋했다. 아니, 진짜 싫었던 것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는 아둔한 자기 자신이었다. 하나 알려주면 열을 깨우친다는 천재는 고사하고 하나 알려주면 그거 하나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평범한 자기 자신. 허우대만은 멀쩡했지만 그것도 평균보다 미세한 차이로 앞설 뿐이고, 무엇보다 운동을 배울 여건도 못됐다. 생긴 건 그럭저럭 준수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실제로는 깨끗한 피부 때문에 플러스 된 점수에 불과하고 그것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뭐하나 특출하게 잘하는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자신이 고생만 하는 부모님을 호강시켜주기는 글렀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 때문에 그들을 싫어했다. 자신을 향한 그 기대에 찬 눈망울이 싫었다. 동생이나 하나 더 낳지. 하나 알려주면 열을 아는 천재로, 천성적인 자질로 배우지 않아도 운동 잘하는 놈으로, 길가에서 모델제의가 들어오는 미남으로. 그런 놈으로 하나만 더 낫지. 왜 나 하나만 낳아서, 뭐 하나 건질 것 없는 나 하나만 낳아서! 어린 마음에 가출도 몇 번 했다. 그래도 돌아갈 곳은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뿐이라는 걸 알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뜩이나 마음고생 심한 부모님의 마음에 못 박고 또 박고. 너 하나는 꼭 대학 보내주마, 그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 하는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도 모른 척 하고. 있을 때 잘하라고 누가 그랬던가. 상처만 죽어라 줬는데, 제대로 호호 불어드리기도 전에 떠나셨다. 인기척 없는 외진 골목에서 목격자 하나 없는 뺑소니. 그리고 즉사……. 모아 놓은 돈은 당연히 없었다. 고작 16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니 눈앞이 깜깜했다. 중졸이라는 타이틀을 딴 것은 당시 그의 담임이었던 노년의 선생님이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푼돈이나마 용돈을 주고 학교에 건의하여 등록금을 면제받고……. 그가 졸업하는 해에 그 노인장도 정년퇴직하기 때문에 애착을 가졌던 모양이다. 마지막 가르치는 제자들을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서 도와주었던 모양이다. 순수한 정의감과 동정이었다면 은퇴하자마자 연락을 끊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배은망덕하게 그가 베풀어준 일을 외면하고 욕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정고시를 치를 생각이었다. 이 아둔한 머리로 독학이 가능할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죽어라 일해서 등록금을 모아두면서 공부를 하자. 수능시험도 치르자. 대학도 가자. 부모님이 그에게 그토록 가길 원했던 대학을 가자. 애써 명랑하게 다짐했던 것도 한때다. 세상을 몰랐던 거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안 세상은 미약하나마 부모님이 만들어준 울타리 안에서 바라본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 미약한 울타리가 사라진 뒤에 제대로 본 세상은 너무 추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외로웠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반년하고도 4개월을 더 버텼다. 시리고, 시리고 시려서 더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던 그 날, 결국 자살을 결심했다. 죽자! 죽어서 다시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번에는 제대로 효도하자! 죽자! 죽기로 결심하니 그 동안 푼돈이나마 모아둔 돈이 아까워졌다. 써보고 죽자. 남기고 죽어봐야 저걸 누가 쓰겠나. 내가 쓰고 말지. 누구에게 뺏길 새라 돈 봉투를 품에 안고 거리로 나왔다. 품 안의 돈을 오늘 다 쓰겠다고 생각하니,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까마득한 곳이었던 나이트의 문턱이 몹시도 낮게 보였다. 초라한 행색을 한 몸을 살펴보고 아무 옷가게나 들어가 대충 그럴싸한 옷을 걸쳐 입고 가장 으리으리해 보이는 곳으로 갔다. 미성년자라 나이트를 들어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주춤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쉽게 들여보내주었다. 흔한 민증 검사도 없었다. 대신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윤명고냐?” 윤명고라면 말로는 중학시절 말로만 들었던 명문 고교였다. 특히 남녀공학으로 유명했다. 다들 그곳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났고, 지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을 거 거짓말 하나가 대수냐, 나도 말로만이라도 고등학생 되어보자 싶어 뻔뻔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과연 명문 고교. 회식은 나이트에서 하나보지? 속으로는 끝없이 투덜대면서. “이름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물어오는 그들을 내심 비웃었다. 그 많은 학생들 이름을 지들이 하나하나 알 턱이 있나. 보니 명단도 없구만. “서지무.” 어째서인지 흠칫 놀란 얼굴로 다시 한번 지무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 노골적인 탐색에 지무는 일부러 싸늘한 음성을 냈다. 이런 쪽에 종사하는 녀석이라면 입구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계속 세워둘 겁니까?” “드, 들어가십시오.” 반사적으로 그런 건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짧았던 말이 꽤 길어졌다. 지무는 화려한 출구를 쭉 살펴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삼키고 애써 덤덤한 척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껏해야 탈선의 한 방향으로 호프집이나 들락날락 했던 지무로서는 17년 인생의 마지막에 온 곳이 이곳이라는 것에 심히 만족했다. 있는 돈 다 쓰고 아파트나 한강에 투신해야지. “여자를 데려올까요?” “필요 없어. 술 갖고 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선배 종업원들에게 시달렸던 것을 이곳에서 풀 요량으로 건방지게 명령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일 지무의 행태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웨이터는 담담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가버렸다. 덕분에 지무는 김빠진 얼굴로 더 도발하지 않고 가지고 온 술만 마셨다. 술 종류에 대해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양주가 세병이나 왔다. 안주도 상에 가득 차려졌다. 이곳만의 서비스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동창회나 동문회를 열고 있을 윤명고에서 지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무는 그냥 마시고 먹었다. 어차피 그 둘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술값은 낼 수 있었다. 곧 죽을 거라 생각하니 배짱만 두둑해졌다. 지무 혼자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술을 마시던 자들이 벌떡 일었다. 그리곤 일제히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인사하는 무리들을 헤집으며 한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주위 눈치를 보며 대세를 따랐을 테지만 죽음을 각오하니 모든 게 별세계 일로 느껴져 덤덤하게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아직 남자보다는 소년이란 호칭이 어울릴 나이로 보였지만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백이 ‘남자’라고 칭하게 만들었다. 생기기는 기똥차게 잘생겼다. 냉기서린 얼굴은 앳되면서도 위엄 있었고 날카로운 눈매에 콧날도 시원하게 잘 빠졌다. 새하얀 피부에 입술은 매혹적인 분홍이다. 냉철하고 금욕적인 듯 보이면서 섹시했다. 180㎝는 훌쩍 넘길 듯한 장신의 몸은 균형 있게 근육이 조여져 있어 전신이 무기처럼 느껴지는 압도감이 있었다. 마치 우아한 맹수 같았다. ‘내가 저렇게 생겼으면 모델로 나섰을 텐데. 그럼 울 부모님들 호강시켜드릴 수 있었을 텐데.’ 지무는 남자의 미모에 차라리 씁쓸해졌다. 다들 일어나 인사하는 걸 보면, 그것도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는 걸 보면 분명 힘 있는 놈일 테지. 재력이든 권력이든, 혹은 무력이든.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기운을 두르고 있는 그에게 한 웨이터가 다가갔다. 눈에 익다싶어 자세히 보니 지무를 안내한 그 웨이터였다. 그가 남자의 귀에 뭐라 속삭이자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냉기가 한풀 꺾였다. “형님이 오셨다고?” 예리한 검과 같던 남자의 눈빛이 일순 누그러졌다. 웨이터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앞서 걸었다. 남의 일이기에 방관자 시점으로 그들을 보던 지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야 했다. 웨이터가 정확히 지무 쪽을 가리킨 데다, 착각이려니 하기에는 그들이 오고 있는 방향역시 지무 쪽이었다. ‘뭐, 뭐야?’ 도망치고 싶어도 그 둘의 행보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지무에게 향한 탓에 인파에 휩쓸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또 무작정 튈 수도 없는 것이,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모두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녀석들뿐이었다. 지무의 앞에 선 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지무를 내려다보았다. 이쪽으로 급히 걸어오면서 보였던 옅은 친밀감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의 미묘함을 알아챈 웨이터는 말없이 인기척을 죽인 채 물러났다. 지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래도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심정으로 계속 남자의 한기서린 눈을 마주보았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이게 형님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이게’라는 단어에 열 받은 지무가 뭐라 항의하려 했지만 남자 쪽이 빨랐다. 어느새 다가와 낚아챘는지, 지무의 멱살을 한 손으로 붙잡고 위로 들어올린 것이다. 170㎝는 가뿐히 넘는 지무의 몸이 허공에 떴다. 욕을 내지르려던 지무는 헉, 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독히 어두워진 남자의 눈에 진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좀 전의 예도(銳刀)와 같던 눈빛은 장난이었다. 그라면 충분히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리라. “뭐하는 물건이냐?” “서, 서지무다!” 어차피 죽을 몸이다, 어차피 죽을 몸이다. 몇 번이나 곱씹고 있는 오기, 없는 배짱 다 쥐어짜 소리쳤지만 자기가 들어도 겁에 질린 불안한 목소리였다. “네가 서지무라고?” 이제는 남자의 살기가 온 몸을 찔러댔다. 지무는 억울했다. 자기 이름 자기가 댄다는데 뭐가 불만이어서 살기까지 띠운단 말인가. “네 까짓 게 서지무라고?” “씹!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내가 서지무지, 그럼 네가 서지무냐?!” 버럭 소리 지르면서 몸부림쳤지만 꿈쩍도 안했다. 남자는 옆에서 대기 중인 놈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두 놈이 다가와 지무의 몸을 뒤졌다. “개새끼! 이거 안 놔? 썅! 놔!” 욕을 해가며 미친 듯이 몸을 비틀고 난리를 쳤지만 여전히 꿈쩍도 안했다. 한 손으로 들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는 동안 돈 봉투와 지갑, 그리고 메모지를 두 놈에게 강탈당했다. 전리품을 남자의 앞에 공손히 가져다 바치자, 그제야 붙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쳐 지무를 내던졌다. 지무는 자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달려들려 했지만 남자의 짧은 명령에 저지당했다. “잡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놈이 달려들어 사지를 붙잡아 버렸다. 남자는 욕을 지껄이는 지무를 내버려 두고 지무의 짐을 살펴보았다. 꽤 두둑한 액수가 들어가 있는 봉투는 대충 보고 곧장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고 지갑을 열어 그 안에 꽂혀있는 학생증을 뽑아들었다. 중학교 때의 학생증인데, 학생시절에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지무의 사진과 더불어 그 밑에 고딕체로 적혀 있는 ‘서지무’라는 이름을 본 남자는 짧게 웃었다. 허탈한 듯이. 그리곤 지갑과 학생증도 테이블 위에 던져버리고 마지막으로 메모를 읽었다. -부모님 곁에 갑니다. 메모까지 던져버리고 넓은 소파에 혼자 앉아서 긴 다리를 꼬았다. 남자가 눈짓을 하자 지무를 포박하고 있던 놈들이 그를 질질 끌고 와 남자 앞에 무릎 꿇겼다. 굴욕적이었지만 힘이 없었다. 지무는 빠득 빠득 이를 갈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화낼 정신도 없이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테지만, 앞서 말했듯이 곧 죽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배짱만 두둑해졌다. “출신은?” “뭐?” “학교. 생일년도를 보니 열일곱이군. 어느 고지?” “…….” 지무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중졸이라고, 고등학교는 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비참했다. 그러나 상대는 지무의 심정을 배려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이곳은 오늘 우리가 전세 냈는데 무슨 속셈으로 들어왔지?” “…….” 계속 침묵하는 지무가 거슬렸는지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무를 붙잡고 있는 놈에게 눈짓하자 무자비하게 팔을 꺾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지무에게 남자는 다시 물었다. “어디 쥐새끼냐?” “……녀.” “뭐?” “학교 안 다닌다고, 씹새야!” 악에 박친 지무의 괴성에도 남자는 감흥 없이 물었다. “무슨 속셈으로 들어왔지?” “씹! 폼 나게 술 한번 처먹으려고 왔다! 왜?!” 남자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을 때,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남자는 여전히 지무를 노려본 채 말했다. “뭐냐?” “여어! 오늘 윤명고에서 회식이 있다기에 인사차 왔다.” 답한 것은 명랑한 목소리였다. 지무는 남자 너머로 막 소란을 일으켰던 주범을 보았다. 하얗게 탈색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워낙 머리카락이 독특해 외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키는 지무보다 약간 클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낮으면서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성진고 떨거지였군.” “그렇게 매정한 말 말라고. 우리 애들이 상처 입잖아.” 그렇지 않아도 백발 소년의 뒤를 포진해 있던 녀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백발소년은 어디까지나 여유만만이었다. “지무에게 버림받았다면서, 잘난 강진 씨.” 지무는 뜬금없이 거론된 자신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가 뭘 버렸다는 건지……. “형님이다. 존칭 붙여.” “형님? 너한테나 형님이지.” 백발소년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난 일학년 애송이를 형님으로 모시는 속 좋은 짓은 못해서 말이야.” “그 말 취소하는 게 좋을 거다.” 지무는 마른침을 삼켰다. 딸꾹질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지무를 노려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살기가 사방으로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백발소년도 그 기색을 읽었는지 조금 질린 얼굴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강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기의 밀도도 높아졌다. “뭐, 좋은 자리 더 방해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군. 그럼 지무 행방이나 잘 찾아보라고. 쿡쿡. 찾으면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전해줘.” 끝까지 존칭을 붙이지 않고 퇴장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우려 했었지만 강진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쳐.” 그 한 음절로 인해, 지무의 17년 평생 꿈도 못 꿨던 화려하고 사치스런 나이트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입을 떡하니 벌리고 넋을 잃고 난장판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혀 개인이 눈에 띄기 힘든 그 소란 속에서도 강진은 강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덤벼드는 놈들을 일일이 상대하면서도 도망치는 백발소년을 향해 정확히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짜고 치는 무협 영화 같았다. 치는 대로 쓰러지고 차는 대로 날라 갔다. 얼마나 절묘하게 움직이는 지, 그냥 보자면 저들이 강진의 팔과 다리에 멋대로 와 부딪치고 멋대로 날라 가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절제되어 있는 공격과 방어에는 불필요한 움직임이 일체 없이 깔끔했다. 정식으로 무예를 배운 모양이다. 결국 백발소년을 붙잡은 강진은 여태껏 길을 뚫기 위해 대충 상대해주었던 여타 피라미들과는 달리 그를 정중히 제대로 대우해주었다. 당장의 방해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던져(?)버렸던 파리미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잘근잘근 밟아준 것이다. 백발소년이 대장이었는지 그가 제압당하자 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피투성이가 되어 밟히던 백발소년이 악으로 깡으로 소리 질렀다. “지무 새끼가 너 버리고, 윤명 버리고 토꼈다는 거 알 놈은 다 알아! 애송이 자식을 형님이라고 모시고 있던 네 놈 꼴만 우습게 된 거다! 후계로 지목도 못 받고 개밥이 도토리 신세지! 꼴좋다, 강진!” 컥, 하고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백발소년은 의식을 잃었다. 강진의 그의 머리를 걷어 차버린 것이다. 백발소년의 악담만이 싸늘해진 나이트 안을 메웠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 메아리 치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강진이 그 절박한 혼란을 단호히 잘라냈다. “치워.” 그의 명이 떨어지자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는 놈들을 질질 끌어다 어디론가 가버렸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버리고 공중전화로 구급차를 부르면 뒷정리는 끝이다. 지무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 참으로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것에 계속 넋을 잃고 있었다. 강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순간이나마 지무는 강진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진은 살기를 가라앉히고 한층 차분해진 모습으로 그에게 걸어왔다. 몸 곳곳에 묻어 있는 피와 얼굴에 몇 방울 튄 피가 오싹하리만치 위험해 보였다. 또 그만큼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섹시’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독버섯의 그것처럼 화려한 독기가 있었다. 아니, 독버섯 같은 귀여운 단어로는 부족하다. 피에 젖어있는 맹수. 피 냄새를 가득 풍기면서 냉철한 눈으로 사위를 돌아보는 차분함에 강자의 우아함과 오만을 겸비한 아름다운 맹수였다. 지무는 자신이 오늘 중으로 강행하리라 마음먹은 죽음보다도 눈앞의 강진이 더 무서웠다. 좀 전까지 그를 지탱해주던 죽음을 앞둔 자의 배짱은 저 맹수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덜덜 떠는 지무를 냉정한 눈으로 내려보던 강진이 슬쩍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허리가 지끈해질 정도로 요염한 미소였다. 곱상한 얼굴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할 줄 알았던 유혹의 색이 저 기품과 냉기를 갖춘, 지극히 남자다운 그에게서도 나타났다. 지무는 흠칫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너 학교에 다니고 싶지?” “…….”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 아니 강압이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고개를 끄떡였을 정도로 은밀한 강제가 그 짧은 질문 속에 있었다. 지무는 얼른 고개를 끄떡였다. 실제로 그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학교라는 보호막을 맛보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각오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삶의 대한 갈망도 그만큼 있었다. 상황만 따라주면 살고 싶었다.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희망이란 게 있다면 살아보고 싶었다. “다니게 해주지.” 강진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단, 형님을 대신해서다.” “……?” “형님의 대리인 거다. 형님이 돌아올 때까지. 혹은…….” 강진의 미소가 걷어졌다. 연기로라도 웃음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어떤 것이 그에게서 여유를 앗아간 것이다. 강진의 커다란 손아귀가 지무의 목을 움켜쥐었다. 가해지는 힘에 숨이 콱 막혔다. “너에게 거부권은 없다.” “아……알았……컥!” 필사적으로 답하는 지무를 무심한 눈으로, 그래서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다. “대가는 주지.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좋아.” 그리곤 더 이상 지켜볼 가치가 없다는 듯 곧장 돌아섰다. “치우고 즐겨.” 싸움이 벌어진 곳이 입구 쪽이기 때문에 안 쪽은 멀쩡했다. 던져댔던 테이블과 의자를 바로하자 정돈은 끝났다. 곧 음악이 나오고 피신해 있던 여자들도 나왔다. 모두가 술을 마시며 춤을 출 때, 아까와는 다른 광란의 도가니를 만들어 댈 때, 지무는 목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붙잡혀 있는 것만 같았다. 커다랗고 단단하고 의외로 따뜻한 맹수의 손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죽기 전에 원 없이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고급 나이트까지 갔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형님’으로 오인 받고 호사로운 대접을 받다가, 걸려 추궁을 받고, 중간에 난입한 무리와의 패싸움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멋대로 계약을 강요받아 이름만 같은 놈의 대리출석을 해줘야 하는……. “젠장. 정리하기도 힘들군. 무슨 꼴이야, 이게.” 머리를 벅벅 긁다가 바닥에 던져 놓은 물건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고스란히 돌려받은 돈 봉투와 지갑, 그리고 유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메모지. 메모지 위에 적은 한 토막 글을 눈으로 훑어보곤 쿡쿡 웃었다. 강진은 지무를 돌려보내기 전에 경고했다. 멋대로 죽으려 들었다간, 정말로 죽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려주겠다고. 그리곤 밑의 똘마니들을 시켜 지무를 데려다 주게 했다. 말이 데려다 주는 거지 실상은 지무의 거처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똘마니를 시켜 교복과 가방, 학용품과 교과서 등등 학교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사게 했다. 그 똘마니는 사들인 물건을 몽땅 지무의 방에 집어넣고 갔다. 중학생 때는 동네 형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던 지무는 빳빳한 새 교복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지면 손이라도 베일 것 같은 새 교과서도 생소했다. 게다가 그것들을 사고 남은 잔돈이라며 물건들 위에 던져두고 간 돈은 지무가 그동안 악착같이 모았던 돈보다는 적었지만, 아르바이트 한달 뛴 돈 보다는 훨씬 많은 액수였다. 선금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계약’이라면서 한달에 한번씩 돈을 지급해주겠단다. 전에 벌었던 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액수다. 삼년, 아니 일년은 거의 지났으니 이년 정도 학교를 다녀서 받은 졸업장은 그 ‘형님’이라는 작자의 몫이지만 지식은 머리에 남는다. 검정고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졸업장을 받게 되면 월급과는 별도의 보수를 준다고 했다. 돈 썩어나나 보다. 잘생기고 싸움 잘하고 돈도 많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격은 더러워야 해!” 공연히 승질을 내던 지무는 바람 빠진 풍선마냥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부모님 곁으로 간다더니, 왜 여기로 돌아왔냐? 병신.” 간사한 머리는 벌써 살아갈 궁리를 하느라 바쁘다. 결국 살고 싶었다는 거지. 돌파구 같지도 않은 돌파구 하나 생겼다고 입 싹 씻을 정도로. 조금 상황이 달라진 것 정도로.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이거냐?” 자신을 비웃으면서 손을 뻗어 메모지를 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어 구겨버렸다. 어쨌거나, 살아보자.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낸……은 아니고 대충 세수하고 양치질 한 지무는 벽에 걸어놓은 교복을 입었다. 벽에 걸려있는 타원형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은 본인 눈으로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어 공연히 민망해졌다. “머리가 너무 긴가?” 자를 필요도, 여유도 없어서 내버려 둔 머리가 벌써 눈을 찌르고 있다. 뒷머리도 길어서 묶을 수 있을 정도다. 교복이 안 어울리는 것은 그 탓일까? “가는 길에 자를까?” 고민하다가 돈 아끼자는 생각에 가위를 찾았다. 뒷머리만 잘라내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는 꼴을 보니 학교 일진인 모양인데, 일학년인데 형님으로 모셔졌을 정도면 꽤 유명하겠지? 어제 그 놈처럼 하얀 머리일지도 몰라.” 강진이 단정한 흑발이었다는 것은 기억 속 저 너머에 묻어버리고, 잡히는 데로 싹둑싹둑 잘랐다.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어서 상태를 확인해보니 그렇게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이정도면 학교 일진으로서는 모범생이지! 암암!” 책가방을 들려고 보니 텅텅 비어 있었다. 한 쪽에 쌓여있는 교과서를 손에 집히는 데로 쑤셔 넣었다. 과목이 맞아떨어지면 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라고 대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기본음이었다. 핸드폰이 없는 지무는 흠칫 놀라서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교복 안 주머니였다. 그러는 동안 한계가 됐는지, 벨소리가 멈췄다. “뭐, 뭐냐, 이건?” 심플한 디자인의 최신형 핸드폰을 내려보며 멍해있는데, 다시 불이 들어오면서 기운차게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받아서 귀에 대자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호인이가 갈 거다. 기다렸다 같이 등교해라.” “저기,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선생님들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해야 하죠? 반 애들은 사정을 다 아나요?” 어제부터 궁금해 했던 점을 급히 늘여놓았지만 답이 없었다. 얼굴을 떼고 액정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끊겨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꼭 생긴 데로 놀아요.” 구시렁대면서 핸드폰을 도로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 지무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똑같은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는 한가롭게 팔짱을 꼈다. 창백하다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아이였다. 작고 찢어진, 매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이 맞물려 곱상하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근육이 딱 잡힌 몸이 교복을 입었음에도 확연히 드러나 전체적으로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키는 지무보다 4㎝정도 클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힌 지무를 위아래로 한차례 훑어보고는 바깥쪽으로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준비 다했음 가자.” “너 뭐야?” “못 들었어? 강진 형님이 말해둔다고 했는데?” ‘강진’하니까, 방금 전의 매너 없는 통화내용이 떠올랐다.통화라기보다는 통보였지만. “호인?” “유호인. 너랑 같은 학년이고, 반은 5반. 넌 1반. 아, 시간표는?” “알 리가 있냐? 그냥 대충 쑤셔 넣는 중이다.” 그러자 신발을 벗고 척척 들어오더니 지무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뺏어 들었다. 가방에 있는 내용물은 죄다 도로 꺼낸 뒤,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 읽고 쌓여있는 교과서 중 몇 권을 집어넣었다. 그런 호인을 엉거주춤 지켜보다가 물었다. 지무로서는 당연히 알아 두어야 하는 내용이라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거냐? 선생님들이 뭐라고 안 해? 반 애들은?” “지금은 앉아있기만 해도 돼. 너 전에도 돌아가면서 대리출석 해왔어. 한 한달 정도 됐나? 선생들도 내버려 두고 있고, 반 놈들도 상관 안 해. 돌아가면서 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곧 시험이라 중졸 중에서 그럴싸한 놈 하나 데려다 앉히려고 찾고 있었는데 네가 딱 걸린 거지.” “강진이란…… 분, 빽이 좋나보지?” “강진 형님 빽 말고도 지무 형님의 실적 덕도 있어. 퇴학시키는 것보다 어떻게든 학교에 남겨두는 쪽이 이득이다, 이거지.” “실적? 강호를 평정해서 세상에 평화를 안겨주기라도 한 거냐?”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진심을 섞은 질문이었는데, 호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댔다. “강호? 소설 쓰냐? 하하하!” “씹!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무안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호인은 가방의 지퍼를 잠그고 지무에게 던졌다. “가자.” 먼저 나가 신발을 신다말고 지무를 돌아봤다. 가방을 멘 지무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까 질문의 답.” “무슨 질문?” 질문 한 게 한 두개여야지. “지무 형님의 실적.” “아아.” 관심 없이 고개를 끄떡여 호응하는데, 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항상 수석이었어.” “……헤에.” 마찬가지로 감흥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뻔히 보이는 대리출석이 용납되는 것도, 평균을 깎아 먹히기 싫다는 학교 측의 발악인 거지.” “학교에서 잘 나가려면 공부를 잘하는 수밖에 없는 거로군.” 세계가 다르다, 세계가. 중얼대는 지무를 보며 호인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려고만 하지 말고, 머리 좀 굴려봐라.” “뭐!?” 발끈하는 지무를 한심하다는 듯 보며 확인했다. “너 앞으로 지무 형님 대리출석 담당자라며?” “그렇지.” “지무 형님이 너한테 대리출석 부탁하고 갔냐? 아니지? 지무 형님은 그냥 말없이 잠적한 거란 말이야. 그런 사람이 시험기간이라고 학교에 나오겠냐?” “……?” “네 놈 목 위에 붙어 있는 건 장식이냐?” 상당히 모욕적인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 호인은 시간을 확인하고 앞서 걸어 가버렸다. 지무도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허둥지둥 신발을 신고 뒤를 쫓았다. 같이 버스를 타고 학교 앞까지 온 호인이 문방구에 들리면서 교문 옆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 말을 얌전히 따라 교문 옆에 서서 그를 기다리는 데, 선도부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거기 너!” “……?” “보아하니 명찰을 안 달고 온 모양인데, 거기 서있는 다고 뭐가 달라지는 줄 알아? 얼른 들어와서 학년, 반, 이름 불어.” “아……!” 지무는 당황해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봤다. 그러고 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왼쪽 가슴이 밋밋하니 허전했다. 그가 다녔던 중학교는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교복이었던 탓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저기, 친구를 기다리는 중인데요?” “이 새끼가! 곱게 말해선 못 알아 처먹나? 친구가 명찰이라도 파준데? 우리 학교 명찰은 특별 주문해야 하는 거 몰라? 얼른 안 뛰어와!?” 돌아가 호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선도부원이 얼른 달려와 팔뚝을 잡아채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지무가 도망치려한 줄 안 선도부원은 한층 험악해진 얼굴로 그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지, 진짜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벌서면서 기다려!” “그, 그게……!” 교문 안까지 끌고 들어온 선도부원은 손을 탁 놓고 수첩을 폈다. “학년! 반! 이름!” “…….” 당황해서 학년도 반도 까먹은 지무가 식은땀만 흘려대자, 선두부원이 인상을 팍 쓰며 위협했다. “너, 기합부터 받고 시작할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누가 기합을 받아?” “호인아!” 지무는 눈물나게 반가워서 목소리가 난 쪽을 냉큼 돌아보았다. 성질 있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물어보면 친절하게 답해주고, 농담도 잘 통하고, 이것저것 조언도 잘해주어서 편하게 느껴지던 호인이 역시나 느긋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말을 건 상대를 확인한 선도부원은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호인.” “우리 쪽 애인데 상관이 없어?” 명찰 색이 다른 것을 보면 상급생인 모양인데 호인은 반 토막 말을 잘도 내뱉었다. ‘호인이 놈도 한 가닥 하는 놈인 모양이네…….’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느긋한 모습의 호인을 보며 지무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런 그를 더욱 주눅 들게 한 것은, 그런 호인에게 선도부원이 바싹 얼어서 더듬더듬 질문하는 모습이었다. 좀 전에 지무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그 위세는 어디로 갔는지……. “이, 이 놈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제 밤에 들어왔다.” 호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가볍게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지무에게로 걸어왔다. 지무는 저도 모르게 흠칫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에 호인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이내 킥킥 웃었다. 주눅 들고, 한 편으로는 긴장했던 자기 자신의 꼴이 심히 쪽팔렸기 때문에 지무는 인상을 팍 쓰고 돌아섰다. 그때는 선도부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이! 가는 건 상관없지만, 명찰은 받아가야지.” “…….” 그냥 성질대로 가버릴 것이냐, 실리를 쫓아 명찰을 받을 것이냐를 두고 갈등하는 지무에게 호인이 결정타를 던졌다. “그리고 너, 반이 어딘지는 알아? 자리는?” “…….” 끙, 하며 돌아서자 호인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지무의 한 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줄곧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던 물건을 지무에게 내밀었다. 직사각형의 파란색 명찰에는 하얀색 글씨로 ‘서지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 서지무?” 본의 아니게 그 둘의 옆에 있었던 선도부원이 헛바람을 삼키자 호인이 그를 돌아보고 나직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떠벌리고 다니기만 해라.” “흠흠.” 선도부원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무도 중학생 때는 방황하는 마음에 꽤 놀았었다. 소위 말하는 불량써클의 일당이었고, 패거리에 섞여 술도 마시고 싸움도 했다. 술은 세지만 싸움은 그리 세지 못해서 맞는 만큼 때려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압도적인 승리도, 일방적인 패배도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사회에 시달리며 많이 주눅들어버리긴 했지만, 한때 놀았다는 유치한 우월감과 오기는 아직도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지무 역시 중학생 때 반에서 그를 어려워하고 함부로 말도 걸지 않고, 은근한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평범한 학생들의 교실답게 시끌벅적했던 교실이 지무, 정확히는 호인이 나타나는 순간 쥐죽은 듯한 정적에 쌓이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여기다.” 비어 있는 창가 맨 뒷자리로 걸어간 호인이 턱 짓으로 가리키자 곳곳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것까지도 그렇다 치자. 덧붙여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것도 그렇다 치자. “그럼 수고!” 호인이 한 손을 쓱 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이제 그만 경계주의보도 풀릴 만도 하건만 다들 지무를 힐끔 보며 자기들끼리 쪽지를 돌려댔다. 어쨌거나 그것도 그렇다 치자. “차렷! 경례!” ……어째서. 담임이랍시고 우락부락한 체육계열 선생님이 와서 조회를 하는데……. “곧 기말 고사인 거 알지?” “예…….” “소리가 적다. 오랜만에 우표 수거할까? 우체통에서 꺼내보는 반가운 소식, 좋지?” “아니요!” “우우!” 분명 ‘기말고사’ 운운할 때 눈이 마주쳤는데……. “실장은 전체 범위 정리해서 게시판에 붙이고. 주번은 칠판 밑 좀 쓸어라. 이상.” “차렷! 경례!” 어째서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나가는 거냔 말이다! 호인을 통해 대충 들은 반응이긴 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신선하다 못해 열 받을 지경이었다. 그가 엇나갔을 당시에는 대리출석 따위는 꿈도 못 꿨다. 결석이 좀 잦다 싶으면 여지없이 끌려가 두들겨 맞았는데……. 열 받다 못해 허탈해진 지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조용히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소리와 온 몸을 콕콕 찌르는 시선들에 민망함과 막막함, 어색함과 더불어 부정할 수 없는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던 지무는 어느 순간 교실이 싸하게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호인이 나타났을 때의 그 정적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 긴장, 공포 등이 교실 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다. 정적의 원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이, 그 ‘원인’은 한 눈에 띠었다. 교탁에 기대어 있는 남자……. ‘강진.’ 어제와는 다른 모습. 깔끔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마이의 단추를 다 채운 단정하기 그지없는 교복차림의 자태.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흑발을 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미남자. 단순히 ‘잘생겼다’로 표현하는 건 안 어울린다. 서늘하게 날이 서있는 일본도와 같은 매력이 있다. ‘나를 보러 온 건가?’ 긴장감과 더불어 알싸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지무는 그런 자신의 감정상태에 당황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강진은 지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출석부였다. 본래라면 선생님이 가지고 갔다가 다음 과목 선생님이 가지고 오기 때문에 교실에 남아있어서는 안되는 물건이었지만 담임이 깜박하고 두고 간 것이다. 건망증이 있는지 담임은 종종 그런 실수를 하곤 했다. 물론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지무가 알 턱이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먹으며 관심도 없는 교과서를 쳐다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지무는 자신이 여태껏 보았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색채’가 강한 강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하여 살폈다. 때문에 출석부를 펼친 강진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가서 멈추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우 짧은 순간 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까지도. 출석부를 덮은 강진은 고개를 들어 지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지무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고 버텼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강진은 관심 없는 얼굴로 눈을, 고개를,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드륵, 문이 열렸다가 드륵, 닫혔다. 교실을 짓누르고 있던 압력이 탁, 하고 문과 문지방이 부딪치는 순간 깨졌다. “하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안도의 숨소리가 모아져 제법 큰 소리가 났다. 그것에 당황해 지무를 돌아보는 녀석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지무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자신 역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던 탓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일학년을 형님으로 모셨다는 걸 보면, 학교 짱은 분명 아니다. 잘해봐야 이짱정도? 그런데도 반 아이들은 폭군, 아니 독재자를 앞에 둔 힘없는 백성마냥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복종했다. 공갈을 친 것도 아니고 횡포를 부린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비행적인 옷차림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강함은 육체적 감각이 이성보다도 발전된 사내놈들에게는 더 없이 매력적이고 자극적이다. 여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 선배, 너무 멋지지?” “응. 좀 무섭지만 카리스마 있다고 할까.” “집도 부자라더라? GB의 후계자라던가? 암튼 그렇데.” “오오! 그거 먹음직스러운데!? 흐흐.” “그치. 어차피 인생에 남는 건 돈뿐이라잖아. 돈.” ……아무래도 남자에 비해 이성과 지성이 뛰어난 여자 경우에는 본능적인 굴복이 아닌 보다 폭 넓은 조건을 수렴하여 판단하는 모양이다. 지무는 여자들의 수다를 멍하니 듣다가 또 다른 ‘지무’를 생각해 보았다. 한국 3대 기업인 GB의 후계자가 형님으로 모시는, 그것도 연하의 소년. ‘대통령 아들이라도 되나?’ 쓴 웃음이 나왔다. 사는 세상이 너무 달라 아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삼류 순정만화 같아. 이런 설정.’ 차게 조소하며 교과서를 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공부하자! 내가 여기서 건질 수 있는 건 지식뿐이야!’ 2년 동안 돈 모아서 그걸로 전문대라도 가야지. ……그럼 이 열등감도 가셔질까? 점심시간이 되자 호인이 다시 왔다. 책상에 축 늘어져 있는 지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매점 가자.” “아……! 돈을 챙겨왔던가?” 그제야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역시나 돈은 없었다.호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내가 네 식사 담당이야. 가자.” “헐! 계속?” 농담이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계속.”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는 지무의 이마를 검지로 툭 밀며 피식댔다. “감동했냐? 가자. 배고파.” “……식사 담당씩이나 됐으면 5단 찬합으로 도시락이라도 싸가지고 와야 되는 거 아냐?” 지무는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팍 썼다. 호인은 가볍게 받아쳤다. “내가 싸온 걸 먹을 수 있다면 싸와주지.” “……매점 가자.” “현명한 선택이야.” 당연한 거지만 매점은 사람들로 꽉꽉 차있었다. 지옥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듯 아우성치는 교복군단을 보며 지무는 입을 떡 벌렸다. “명문고라해도 결국은 배고픈 애들의 집단이었던 게야.” 도저히 그 안을 헤집고 들어갈 엄두가 안 나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려면 먹어야지. “밖에 벤치나 맡아 놔. 사오는 건 내가 할 테니. 뭐 먹을래?” “메뉴가 뭐, 뭐 있는 지나 알고 답하자.” “그냥 알아서 사오마.” 호인이 식탐의 도가니 속으로 투신하는 장렬한 모습을 깊은 애도의 눈으로 지켜본 지무는 삼빡하게 돌아서 벤치 쪽으로 갔다. 막 빈 봉투 따위를 챙기고 일어나는 인간들 옆에서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는데, 가려고 했던 인간들이 멀뚱히 서서 지무를 내려보았다. 뭔가 싶어 올려보니, 가슴팍에 검은색 명찰이 달려있는 덩치들이었다. 아침에 마주쳤던 선두부원과 같은 색의 명찰. 2학년인지 3학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무보다는 상급생인 모양이다. “서지무?” “그 새끼 잠적했잖아. 대리 출석하는 놈 아냐?” “대리 출석하는 새끼가 그놈 명찰을 달고 있을 리 있냐?” 절대로 비호의적인 목소리였다. 긴장하면서 나름대로 싸움판을 구른 솜씨로 덩치들과 거리를 두었다. “야, 너 본명이 뭐야?” “서지무입니다만.” 아군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지무는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덩치들은 킥킥 웃었다. “이 새끼가 서지무라는데? 서지무 똘마니들은 그 새끼 이름 부르는 것도 어려워하니까, 지가 서지무라고 깝죽대지는 않을 거고……. 역시 헛소문이었나?” “매일 옥상에나 쳐 박혀 있던 놈이 웬일로 이곳까지 납신 거냐?” “이곳까지는 강진의 휘광이 닿지 않을 텐데?” 익숙하게 반원 형태로 포진하는 세 덩치를 보며 지무는 간신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긴장한 것을 들켜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여유롭게, 여유롭게. “어쭈, 씹네? 강진이 뒤를 봐주니까 선배 말도 개소리로 들리냐?” “야야, 어쨌거나 윤명고 짱인데 막말로 물어서야 되겠냐? 이렇게 해야지. 어인 연유로 여기까지 납시셨나이까?” 목소리는 지극히 정중하지만 눈빛은 노골적으로 조소하고 있었다. 지무는 덤덤하게 답했다. 바로 어제였다면 아무리 태연한 척 하려해도 목소리가 떨렸을 테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덤덤하게 낼 수 있었다. 저들의 위협은 강진의 살기에 비하면 하룻강아지의 애교였다. “선배님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전 매점은 밥 먹기 위해 옵니다.” “호오! 배짱은 좋은데?” “강진을 어떻게 후렸는지는 몰라도 우리한테는 안돼, 새끼야.” “우리가 진 건 강진이지, 네 놈이 아니란 말이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어느 샌가 멀찍이 물러났다. 벤치들 속에 지무와 세 명의 상급생만 남았다. 최고조에 달한 긴장된 공기가 피부를 찌를 때, 호인의 느긋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무슨 일이십니까?” 덩치 중 한 명이 호인을 돌아보았다. 그 손에 들려 있는 샌드위치와 김밥, 빵 따위를 본 그는 낮게 웃었다. “일학년 짱, 호인을 따까리로 쓰는 걸 보면 지무 본인이 맞는 모양인데?” “아닙니다.” 상황을 바로 파악한 호인은 이견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답했다. 덩치들은 인상을 팍 쓰며 지무와 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인을 도발했던 놈이 물었다. “아니야?” “아닙니다.” “저 명찰은?” “동명이인입니다.” “그걸 믿으라고?” “믿든 안 믿든 자유입니다만, 저 놈이 지무 형님이라면 제가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덩치는 막 잡은 먹이를 한번 씹어보기도 전에 뱉어야 하는 상황이 영 마땅치 않은 지 계속 잡고 늘어졌다. “널 시켜먹는 건? 설마 이 새끼한테 진 거냐? 일학년 짱이 바뀌었는데 우리한테 보고 안 할리는 없고…….” “강진 형님 명이십니다.” “강진이 너보고 저 새끼 따까리 하라고 했다고?” “학교생활 적응하게 도우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덩치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천하의 강진이 그 정도로 신경써주는 인간이 서지무 말고 또 있던가?” “지무 형님 대리출석 담당이거든요.” 덩치들은 지무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돈 많은 새끼들은 별 걸 다 할 수 있단 말이야.” “어쨌거나, 지무 새끼가 날랐다는 건 진짜인가보군.” 그리곤 돌아서서 한번씩 호인의 어깨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가버렸다. 호인은 어디까지나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두 손 가득 사온 음식보따리를 벤츠 위에 쏟아내는 호인의 옆에 털썩 앉아 물었다. “누구?” “2학년 선배들.” “3학년은 무슨 색이야?” “……?” 캔 콜라를 내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질문인지 파악이 안 된 것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갈증이 심하게 난 지무는 급하게 몇 모금 마셨다. 강한 탄산이 식도를 긁어내려 고통스러웠지만 갈증 쪽이 더 급했다. 몇 번 더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하고 질문을 좀더 풀어서 말했다. “명찰색 말이야. 일학년은 파랑, 이학년은 검정, 삼학년은?” “아아. 그거? 삼학년은 빨강.” “우, 촌스러.” “아니야. 검은색이 섞인 빨강인데, 그렇게 촌스럽지는 않아. 노랑색보다는 낫잖아.” “노랑도 있어?” “성진고가 일학년이 노랑이야. 게다가 이학년은 연두. 최악이지.” “하하! 그럼 삼학년은 핑크냐?” 호인은 먹던 음료수를 풋 뿜어내고 한참 낄낄댔다. “그거 걸작이다! 완전 새나라 유치원이군. 킥킥! 유감이지만 삼학년은 파랑. 우리 것보다 좀 밝지만…….” 둘은 계속 웃어대면서도 부지런히 먹었다. 특히 지무는 2교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시락을 까먹는 반 녀석들 보면서 부러움에 피눈물을 삼켰던 터라 한층 더 배가 고팠다. “그 지무……형님이라는 사람. 학교 짱이라면서?” “그렇지.” “근데 아까 그 선배들은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던 거냐?” 그 질문에 호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콜라를 마셨다. 지무로서는 앞으로 학교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라 질문을 취소하지도 못하고 샌드위치만 꾸역꾸역 먹으면서 답을 기다렸다. “강진 형님은 강해. 어제 봐서 알겠지만.” “괴물이더라.” 끄떡이며 호응하자, 호인이 씩 웃었다. “그 강진 형님이 유일하게 머리를 숙이는 게 지무 형님이야.” “그 지무 형님…… 이라는 사람이 강한 건 아니고?” “몰라.” “몰라?” ‘지무 형님’이라고 깍듯이 모시면서 그걸 모른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놀리지 말라며 물었지만 호인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여 다시 반복했다. “몰라. 작년까지 짱은 강진 형님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되서 접수했지. 그때까지는 다들 인정했어. 아까 그 형님들도 강진 형님과 붙어서 진 뒤로는 추종자가 되었고……. 타 학교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강진 형님은 강했고 유명했어. 나도 강진 형님 때문에 이곳에 입학한 거였으니까.” 한숨을 내쉰 호인은 한 입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곤 남은 콜라를 다 들이켰다. 빈 깡통을 한 손으로 우지끈 뭉개고 멀리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깔끔하게 들어간 모습을 보고 짧게 나이스, 하고 씩 웃었다. 그 다음에야 지무를 돌아보고 말했다. “올해 지무 형님이 입학하셨을 때, 강진 형님은 일학년인 지무 형님을 자신의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기 시작했다. 둘이 싸움을 해서 지무 형님이 이겼다면 논란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어. 이유도 모르고 납득도 할 수 없는데, 강진 형님은 지무 형님을 모시라고 했지. 다들 강진 형님의 입김 탓에 말은 못하지만 불만이 많았어. 만날 수석 하는 명석한 두뇌 따위 우리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으니까.” 호인은 한숨을 푹 쉬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계속했다. 지무가 알아둬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 전, 지무 형님이 잠적하셨다. 어쨌거나 짱인데, 후계도 지목안하고 갑자기 사라지신거야. 핸드폰도 해지되어 있고, 무슨 말을 남긴 것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돌연히.” 지무는 공연히 가슴이 싸해졌다. 문득 어제 일이 떠올랐다. 백발 소년의 악의에 찬 조소. 그것은 강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이요, 시선이었다. 주위의 불만을 짓눌러가면서 ‘서지무’를 열성적으로 받들었던 강진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자신의 형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얼마나 클까? 저 단단한 냉혈의 방패 안 쪽에 썩어 문드러진 상처가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니 화마저 났다. 호인은 지무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강진 형님이 배신을 당했다고 말들이 많아. 강진 형님을 추앙하기에 여태껏 참았던 선배들의 기세도 흉흉해졌고……. 만약 지무 형님이 돌아온다면 어떤 식으로 치닫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야.” 호인은 진지하게 경고했다. “선배들 중에는 지무 형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많아. 강진 형님의 가드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게다가 학교에는 동명이인이 없어. 당분간은 저런 일을 자주 겪을 거야. 그럴 때면 내가 한 것처럼 대리출석 역으로 왔다고 답해. 강진 형님의 지극정성을 다들 아니까, 강진 형님이 돈 썼구나 하고 넘어갈 거다.” “으응…….”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대리출석자를 구해서 학교에서 잘리지 않게 할 정도로 ‘서지무’에 대한 충성이 유지되는 건가. 강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멍하니 그 생각을 하는 지무를 호인이 굳은 목소리로 다잡았다. “정신 차려. 대답 똑바로 해. 내 말 제대로 들은 거야?” “어……. 들었어.” 그러나 미덥지 않았는지 호인은 지무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고 자신 쪽을 보게 돌렸다. 호인의 진지하고 강한 눈빛과 마주친 지무는 퍼뜩 정신이 들어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새겨들어. 자칫했다간 선배들 화풀이로 돌아가며 다구리 당할 수 있어.” “응. 알았어.” 호인에게 붙잡혀 있었던 탓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고개까지 끄떡이며 똑바른 어조로 답했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호인은 손을 뗐다. 오후 시간도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학교 짱도 청소를 하는 건가? 대리출석자일 뿐이니까 그냥 해야겠지? 아니지, 대리출석 하는 것뿐인데 청소까지 해줘야 하는 건가? 엉거주춤 책상을 뒤로 밀고 머뭇거리는 데, 뒷문에서 누군가가 지무를 불렀다. “저, 저기. 서, 서지무…….” 앞의 ‘저기’만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로 작은 말이었지만 교실이 조용해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돌아보자 키는 160㎝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키에 비쩍 마른 남자아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지무를 보고 있었다. 누군지 알 턱이 없지만 지금의 거북한 상황에서 탈출할 빌미가 되어줬기에 얼른 다가갔다. 명찰을 보니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로 ‘김현서’라고 써져 있었다. “왜?” “저, 저기…….” 현서는 양 손의 엄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5반의 호, 호인이 급히 할 말 있다고 체육관으로 오래요.” “호인이가?” “예.” 얼른 고개를 끄떡였다. 지무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깔끔하게 답했다. “알았어.” “그, 그럼.”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사라지는 왜소한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무는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체육관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5반이 있는 쪽이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호인이 굳이 1반을 지나쳐서 체육관까지 간 다음에, 또 굳이 다른 녀석을 시켜서 날 불러오라고 했다고? 게다가 안내도 안 해준 체육관을? 흥이다.’ 청소가 한창인 5반 문을 열자, 아이들이 조용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 담당이 아닌 녀석들은 죄다 나갔는지 교실에 남아 있는 녀석은 몇 없었다. 창가 맨 뒷자리를 보자 엎드려서 자고 있는 호인이 보였다. “역시…….” 척척 다가가, 호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햇빛이 눈이 부신 지 인상을 약간 쓴 채 선잠에 들어 있는 호인은 눈을 떴을 때보다도 훨씬 어리게 느껴졌다. 턱을 괸 채 녀석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어깨를 톡톡 쳤다. 꿈틀 미간을 모았다가 가늘게 눈을 떠, 지무 쪽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묘하게 요염해 보이는 곁눈질이었다. “여어!” 한쪽 손을 쓱 들어 보이고 태연히 물었다. “체육관으로 호출해 놓고 자기는 자냐?” “……무슨 소리야?”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 탓에 약간 쉬어 있는 목소리가 제법 무게 있었다. “김현서라는 일학년이 나한테 체육관으로 오라더라. 네가 불렀다고.” “김현서……. 김현서…….”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을 위로 들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생각하느라 살짝 찌푸려져 있는 눈매가 꽤나 지적으로 보였다. 잠깐 사이에 호인의 느낌이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게 된 지무는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너 의외로 잘생겼다.” “……잘생겼으면 잘생긴 거지 의외는 뭐냐?” “쿡쿡.” 앞머리를 쓸어 올렸던 손을 내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 김현서! 1학년 9반의 따까리.” “엥?” “3학년 김윤호 선배의 꼬봉이야. 윤호 선배까지 노리고 있었나.” 어딘지 싸늘한 얼굴이 되서 중얼대던 호인은 갑자기 씩 웃으면서 지무의 등을 탁탁 쳤다. “쪼르륵 가지 않았군. 의외인데?” 대견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 호인을 보며 지무는 인상을 썼다. “누굴 바보로 아나. 1반이 출입구 바로 옆인데, 굳이 거길 지나쳐서 다른 놈을 시켜 날 부를 리 없잖아.” “그래. 잘했다.” 몇 번 더 지무의 등을 친 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진 형님께 보고해야겠다. 윤호 선배까지 나섰으면 3학년 전체가 나선 거라고 봐야 돼. 2학년은 어찌됐든, 3학년은 얼마 안 가 졸업이란 말이지. 가기 전에 크게 한 건 터뜨리려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호인은 지무를 슬쩍 곁눈질하며 작게 혼잣말 했다. “괜히 새우등 터지지는 일 없이 해야…….” “핸드폰으로 하면 안 되는 거냐, 그 보고?” 따라 일어나면서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호인은 일순 굳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하면 강진 형님과 통화하고 싶지 않아.” “어째서?” “본론만 간단히 거든. 만약 내가 전화해서 ‘윤호 선배가 제 이름을 빌어서 지무를 호출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결과는?’이라고 물으실 거야. ‘지무가 눈치 채고 피했습니다’라고 답하면 ‘알았다’로 끝.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그냥 탁 끊어버릴 테지.” 지무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지무도 강진과 통화했을 때 딱 저 꼴이었다. “원래 전화 예절이 그 모양이신가?” “아니. 근래 들어서……. 대략 한 달 전쯤?” “…….” ‘서지무’의 전화를 기다리는 거다. 분명……. 호인은 쓰게 웃었다. “넌 교실로 돌아가 있어. 누가 또 누구 이름으로 부르든 무시하고. 강진 형님 이름으로 호출해도 무시해. 만약 강진 형님이 호출한다면 내가 전화할 테니까.” “응.” 순하게 고개를 끄떡이다가 호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내 번호는 알아?” “네 핸드폰을 누가 샀다고 생각하는 거냐?” 호인은 오른손을 쓱 들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곤 그대로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지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 흔한 핸드폰마저 사줄 수 없었던 부모님……. 조무래기들 돈 뜯어서 살림 장만하는 녀석들도 있긴 했지만 지무는 그 짓만은 절대 안했다. 녀석들이 하면 유흥이지만, 자신이 하면 구걸 같았기 때문이다. 통화를 눌러보았다. 통화 목록이 하나 떴다. 모르는 번호지만 주인은 안다. 강진……. 한참동안 목록을 보다가 저장을 눌렀다. ㄱ, ㅏ, ㅇ, ㅈ, ㅣ, ㄴ. 낑낑 자음과 모음을 찍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자음이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있었다면, ‘새끼’는 쌍기역이 들어가니까 ‘그 자식’이나 ‘그 놈’으로 저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름에 복자음이 들어가기도 하던가? “호인이는 유씨니까 ‘ㅠ’가 있군. 점이 이건가……. 아, 아직 번호를 모르는 구나. 좀 있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핸드폰에 적혀져 있는 ‘유호인’이라는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피식 웃으며 닫아버렸다. ‘바보같이. 내 친구도 아닌데…….’ 그래, 강진의 부하일 뿐……. 화장실을 들렀다가, 내친김에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신 뒤 느긋하게 교실로 갔다. 이쯤이면 청소가 끝났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교실을 들어서자 마자였다. 지무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서 지무의 뻣뻣한 새 교과서를 건성으로 뒤척거리는 소년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덩치들. 책상에 얼굴을 박고는 교과서를 미친 듯이 파고 있는 반 아이들. 지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의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이 웃음 띤 얼굴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놈이네? 쪼르륵 쫓아갔다면 비웃어주려고 했더니.”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앳되게만 느껴지는 소년이었지만 결코 호락치 않는 기운이 풍겼다. 주위에 서 있는 덩치 넷을 합친 것보다도 더한 박력을 뿜어내면서 생글생글 웃는 소년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김윤호……?” “선배를 붙여야지?” “……선배.” “옳지. 말 잘 듣네?” 윤호는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지무의 교과서를 탁 덮고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지무에게 걸어왔다. 그 뒤를 덩치들이 따랐다. 지무의 바로 앞까지 온 윤호는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무는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도망을 쳐도 어디로 도망을 친단 말인가. 호인은 반에 없고 강진은 몇 반인지조차 모른다. 저들을 뿌리치고 학교 밖까지 도망칠 자신은 더욱이나 없다. “계속 말 잘 들으면 나쁘게는 안할게. 같이 좀 갈까?” “전 대리출석자일 뿐입니다.” 호인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겼지만 윤호는 킥킥 웃을 뿐이었다. “알아. 들었어.” “그럼 왜…….” “난 지무 형님이란 새끼의 얼굴을 모르거든? 강진이 감쪽같이 숨겨서 말이야.” 그러면서 지무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호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만, 강진이 뒤에서 수작을 부렸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 호인은 강진의 개니까. 그러니까 잠시 좀 같이 가지. 난 못 봤지만, 본 사람도 있거든.” “…….” 지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끌려갔다가 곱게 돌아올 수 있을까? 저들이 원하는 것이 그 ‘서지무’라면 무사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만약의 경우 호인의 말처럼 화풀이 상대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이 이롭겠지. “알겠습니다. 그 전에 가방을 챙겨 와도 될까요?” “아아. 얼마든지.” 윤호는 선뜻 몸을 비켜주었다. 지무는 침착하게 자리로 가서 의자에 걸려있는 가방을 빼냈다. 그리고 서랍에 넣어둔 교과서를 쑤셔 넣고, 책상 위에 널려 있는 필기도구를 필통에 집어넣었다. 윤호들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로 일련의 일들을 해낸 지무는 그 상태에서 낮게 속삭였다. 교실이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말하는 지무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강진 선배한테 알려줘.” 다행히 들었는지 앞에 앉아 있던 놈의 어깨가 움찔했다. 미덥지 않아서 한 번 더 부탁했다. “안하면 평생 원망할 테다.” 놈의 어깨가 떨렸다. 겁먹었나 싶어 혀를 차는 데 놈이 슬쩍 얼굴을 돌려 지무를 올려본다. 전체적으로 딱딱한 표정이긴 했지만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하게 있었고, 눈동자가 짙게 웃고 있었다. 그 반응에 안심한 지무는 가방을 어깨에 메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콜라 쏠게.” 그리고 놈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끌려갔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부드럽고, 안내받았다고 하기에는 자의가 없는 동행은 교문을 나서고도 한참동안 이어졌다. 이래서는 강진에게 알려준다 해도 그쪽에서 자신을 찾을 수단이 없다. 기껏해야 체육관 뒤나 뭐 그런 곳을 상상한 지무는 당황하면서도 짐짓 침착한 척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학교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강진의 눈과 귀가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아, 깜박할 뻔 했군.” 한 걸음 앞서서 걸어가던 윤호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지무의 옆에 걷고 있던 덩치가 보폭을 크게 해서 윤호의 옆으로 갔다. 그리곤 곧장 돌아와 지무의 품을 뒤졌다. “뭐하는 겁니까?” 바로 어제 겪어봤던 일이라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다. 덩치는 지무의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원을 끄고 윤호에게 건넸다. 윤호는 자기 주머니에 넣으면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요즘은 위치추적 기능이란 게 있어서 말이지. 일 끝나면 돌려줄 테니 걱정 마.” 미처 그 생각을 못했던 지무는 뒤늦게 안타까워했다. 알고 있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맞는 건 싫은데…….’ 나름대로 싸움판을 굴렀다고 자부하는 지무다. 다섯의 덩치를 물리치는 건 버겁겠지만 어쨌거나 뿌리치고 도망은 칠 수 있다. 그러나 저 앞의 윤호라는 소년을 당해낼 자신은, 단언하건데 없다. 170㎝을 간신히 넘긴 호리호리한 소년인데 본능이 강하게 경고를 해왔다. 그를 도발하지 마라. 얌전히 그의 말을 들어라. 그는 강하다. 강진의 그 압도적인 기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무를 억압하기에는 충분한 강자의 냄새가 풍겼다. ‘빌어먹을! 놀 때는 저런 거물이랑 마주쳐 본적이 한번도 없건만, 왜 이제와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이어 만나냐고!’ 가장 최강자는 역시 강진이지만……. 저 앞의 윤호도 그렇고, 호인도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또래라 그런지 강진이나 윤호에 비하면 편한 면이 있긴 했지만 친구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앞서 걷던 윤호가 멈춰서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곳이야. 그럴싸하지?” 작업이 중단된 공사판이었다. 건물의 윤곽은 잡혀져 있었다. 철근을 꽂는 단계를 넘어서 회색 시멘트가 발려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소리가 밖으로 샌다 해도 저런 음산한 박력을 뿜어내는 공사판에 일부러 들어와 볼 한가하고 담 큰 사람이 흔할 리 없다. 정말이지 ‘그럴 싸’했다. “가자.” 친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한 윤호는 다시 앞장서 걸었다. 회색 벽돌로 쌓아져 있는 안을 걸어 들어가다가 몇 번을 꺾고,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널찍한 공터와 같은 공간이 종착지였다. 상가가 들어설 곳인 듯 했다. 곳곳에 쌓여있는 자재에 걸터앉아 있는 인원은 생각보다 적었다. 지무는 한창 놀던 때의 버릇으로 저들의 수를 가늠해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인원은 여섯 명. 셋은 여자다. 함께 온 윤호와 덩치들까지 합하면 총 열한명이다. “그 놈이냐?” “이 놈이다.” 물어본 녀석을 바라본 채로 윤호가 손짓하자 지무의 양 팔을 덩치 둘이 각기 붙잡았다. 그리고 패거리가 있는 쪽으로 끌어냈다. 곳곳에 걸터앉아 있던 녀석들 중 가장 안쪽에 있던 여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윤호와 비슷한 체격의 여자였다. 윤호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물었다. “내 귀염둥이는?” 여자가 옆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자 구석에 있던 놈이 왜소한 소년의 한 쪽 팔을 붙잡은 채 나왔다. 지무를 체육관 쪽으로 불러냈던 김현서였다. 바들바들 떨며 끌려나온 현서는 붙들린 손이 풀리기가 무섭게 윤호 쪽으로 쪼르륵 뛰어가 그 뒤에 숨듯이 섰다. 윤호는 키득거리며 현서의 머리를 다소 거칠게 쓰다듬었다. “누가 저 새끼들 따까리 짓 하라고 했냐? 아무한테나 꼬리치고 살라고 내가 그러든?” 그 말에 현서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윤호와 현서는 그리 체격차가 나지 않는데도, 윤호 쪽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윤호는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박력이 있었고 현서는 자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비굴함이 있었다.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사냥꾼과 사냥감. 둘에게서는 그런 기류가 노골적으로 풍겼다. 움츠리는 현서를 보며 다시 쿡쿡 웃은 윤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경고했다. “강진 하는 꼴이 웃겨서 순순히 응해주긴 했지만, 두 번은 없다.” 그리고 시선을 여자에게로 돌렸다. 의미 없는 웃음기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 “특히 이지애. 정식으로 서열쟁탈전 해보고 싶으면 계속 그 지랄 떨어라.” “서열쟁탈전은 어찌돼든 상관없지만, 멋대로 네 것을 사용한 건 사과할게. 내 밑의 놈들은 하나같이 덩치라서 경계할 게 뻔했거든.” “강진 이목을 나한테 돌리고 싶었던 거겠지. 그 놈에게 미움 받는 건 싫었을 테니까. 안 그런가? 지애양의 순애보는 알 놈은 다 아니까.” 윤호의 비아냥거림에도 지애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무를 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를 바로 직시하고 있는 지무는 그녀의 심기가 평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쌍꺼풀이 깊게 패여 있는 크고 검은 눈동자가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격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른침을 한번 삼킨 지무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전 대리출석자일 뿐입니다.” “…….” 지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호가 궁금했던 듯 끼어들었다. “저 놈 말이 맞냐?” “……맞아.” 지애가 이를 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곳곳에서 전투의욕을 다지고 있던 녀석들이 맥이 빠졌는지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야? 진짜 튄 건가?” “거의 일년을 버텼다. 내년이면 2학년이야. 뭐가 아쉬워서 이제와 튀겠어?” 지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지무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연합 쪽 아이는 아니고……. 대가로 뭘 받았냐?” “돈이요.” “돈?” “예. 그리고 학교도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봐야 졸업장은 지무 새끼 꺼 아냐?” 악감정이 절절히 배여 있는 호칭에 지무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조금 동정을 사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됐다. “졸업 후에 검정고시를 보면 되니까요. 혼자 공부하는 건 힘들고, 그럴 여력도 없고……. 대리출석하면서 배운 지식으로 수능 쳐서, 대리출석하면서 받은 돈으로 대학 가려고요.” 지애는 삭막하게 인상을 굳히며 적의 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결국 강진이 또 그 새끼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거군.” “쿡쿡. 그만 포기하지 그래, 이지애.” 윤호였다. 아무래도 지애라는 여자를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윤호뿐인 모양이다. 함부로 윤호의 것을 이용한 빚이 있어서인 것 같았다. 그도 아니면 서열은 어찌됐든 윤호 쪽이 더 강하던가. 지무가 보기에는 두 이유가 모두 혼합된 게 아닌가 싶었다. 윤호의 제의가 심히 거슬렸는지 지애가 차가운 낯으로 윤호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몰라서 묻는 거라면 친절하게 알려주지. 강진은 너한테 흥미 없어. 그 놈 눈에는 ‘서지무’밖에 안 들어와. 그 꼴을 본 적 없는 나도 잘 알겠는데, 직접 본 네가 그걸 모르나?” “그래봐야 남자야. 동경과 사랑은 엄연히 달라.” “문제는 강진의 눈에 이지애라는 여자 자체가 안 들어온다는 거겠지. 동경이고 사랑이고, 다 떠나서 말이야.” “닥쳐!” 결국 무표정이라는 가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그녀를 냉정한 눈으로 보며 윤호가 충고했다. “그래, 그래야 이지애답지.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 아무리 따라하려고 해봤자 넌 위조품이야. ‘서지무’라면 이를 갈면서, 강진 눈에 들어보겠다고 ‘서지무’ 따라하는 거…… 비참하지 않냐?” “닥치라고 했다, 김윤호! 네가 뭘 알아!? 그 새끼 얼굴도 모르는 주제에!” 윤호는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모를 수밖에. 강진이 그렇게 싸고돌았는데. 돈 찔러 넣어서 일학년과 이, 삼학년 체육이 겹치지 않게 하질 않나. 이, 삼학년은 옥상출입 금지시키고 일학년을 ‘서지무’ 따까리로 붙여서 매점 근처에는 올 일 없게 하질 않나. 명색이 짱이란 새끼를 싸움판에는 한번도 안 데리고 오고……. 솔직히 강진이 아무리 지랄해도 그깟 새끼 얼굴 하나 못 볼까싶었는데, 정말로 몇 개월 동안 못 봤잖아.” 그러면서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누구처럼 학 천 마리 접어다가, 바치겠다고 강진의 집 앞에서 줄 창 기다리지 않는 이상 ‘서지무’ 얼굴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 지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빛은 한층 살벌해졌다. 윤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뭐, 강진과 ‘서지무’가 동거하는 사이인 줄은 그 누구씨도 몰랐을 테지만 말이야.” “동거 따위가 아니야!” 지애는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동거 따위가 아니라고! 그 거지새끼가 강진한테 매달려서 얹혀사는 것뿐이었어! 게다가 그 집에는 강진 누나도 같이 사는 걸!” “가족에게까지 인정받은 사이인 건 아니고?” 그 유치한 도발은 지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독이었던 모양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서 주먹만 꾹 쥐는 그녀를 보며 윤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지독히 잔인한 모습이었다. “얹혀사는 거든, 동거하는 거든. 너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을 혜택인 건 분명하지. 안 그래?” 그 말에 지애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김윤호. 네 것을 이용한 빚은 그 정도면 청산 된 것 같은데. 더 지껄여봐.”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였지만 윤호는 바라던 바라는 듯이 더욱 번뜩였다. “이미 한 번 고백해서 거절당한 걸로 아는데, 깨끗하게 물러나는 미덕정도는 보이지 그래?” “‘넌 내 눈에 안 들어와.’라고 거절당했다. 싫다든가, 취향이 아니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눈에 안 들어온다고, 그럼 들어가도록 발악해보는 게 당연하지 않나?” “구질구질할 뿐이야.” “너도 언젠가 한 사람에게 미쳐봐. 내 꼴 돼. 나도 이딴 짓, 구질구질하다고 혐오했던 사람이야!” 윤호는 비웃을 뿐이었고, 산재되어 있는 남녀들은 잠자코 둘의 설전을 보고만 있었다. 강진 바로 다음 서열인 지애와 그 다음인 윤호의 신경전에 끼어들어봐야, 고래 싸움에 등터진 새우 꼴만 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각자 자기가 할 바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무만이 홀로 동떨어져서 갈피를 못 잡았다.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지애와 윤호 사이에 껴서 이래저래 눈치만 살펴야 하는 건가? 그때 갑자기 화살이 지무에게로 날아왔다. “너!” “……?” 지애의 서슬 퍼런 눈동자에 흠칫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대뜸 명령한다. “당장 그만 둬.” “……예?” “대리출석 말이야! 당장 그만 둬! 그 새끼가 튄 건데 왜 강진이 뒷수습해줘야 하는 건데? 그딴 새끼 퇴학이나 당하라고 그래! 오늘부로 그만 둬!” 지무는 잠깐 침묵했다가 차분한 척 기운을 깔고, 마찬가지로 목소리도 깔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뭐라고?” “제가 계약한 것은 강진 선배니까, 마찬가지로 해지할 수 있는 것도 강진 선배뿐입니다. 전 학교도 계속 다니고 싶고, 여기서 많이 배워서 검정고시도 통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대학도 가고 싶습니다.” 지애의 눈매가 변했다.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가느다래졌다. 그리고 온 몸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개새끼…….”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욕설을 내뱉은 그녀는 천천히 지무에게로 걸어왔다. 윤호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한 걸음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는 오른손을 쓱 들어 검지로 지무의 가슴을 찔렀다. “이제 보니 꽤 닮았구나?” “……?” 영문 모를 소리에 눈만 껌벅이는데 다시 한번 찔렀다. “쿡쿡. 건방 떠는 꼴이 꼭 빼닮았어.” 그리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훨씬 더 매력적인 미녀였다. 강한 눈빛에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했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갈증을 느끼게 했다. 강자로서의 미와 여자로서의 미가 한 몸뚱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무에게는 그것이 와 닿지 않았다. 살갗을 찔러대는 그녀의 살기 탓이었다. 지애의 혼잣말과 유사한 서술은 계속됐다. “이런 데를 덤덤하게 따라온 것도 그렇고.” ‘덤덤하게 따라온 게 아니라, 도망 칠 재주가 없으니 얌전히 끌려온 건데요.’ 지무는 억울함을 안으로 삭혔다. 또 쿡 찌른다. “감히 내 앞에서 제 할 말을 끝까지 바득바득 해대는 것도 그렇고.” ‘그야 당신 말 듣고 때려 쳤다간, 강진이 절 죽이려 들 거란 말이지요. 전 당신보다 강진이 더 무섭습니다.’ 역시 억울함은 안으로 삭혔다. 또 쿡. “특히 그 차분한 느낌…….” ‘침착한 척 한 것뿐인데요.’ 지애의 눈매가 한층 매섭게 가늘어졌다. 가슴을 쿡쿡 찌르던 손이 쭉 펴지더니 여태 찔렀던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움켜쥐었다.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섬뜩하게 박혔다. “아주 엿 같아.” 그 바로 다음 순간, 지무의 몸이 오른 쪽으로 크게 꺾였다. 그대로 날라 갈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붙들려 있는 멱살 때문에 상체만 꺾이는 데서 끝났다. 피 냄새가 입안 가득히 퍼졌다. 왼쪽 뺨따귀는 화끈거리는 수준을 넘어서 불이 난 것 같았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몸이 앞으로 꺾였다. 낮아진 시야에 자신의 복부에 박힌 지애의 무릎이 보였다. 그 무릎이 갑자기 가까워진다 싶더니 코에 박혔다. 컥, 소리를 내며 뒤로 꺾였지만 역시나 붙들려 있는 탓에 쓰러지지는 못했다. 싸움판을 굴러다니며 때리는 만큼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이정도로 격심한 고통이 따른 적은 없었다. 고통으로 혼미해진 머리 속에 지애의 마지막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아주 엿 같다고.” 다시 멱살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느끼며 지무는 속으로나마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강진 새끼!’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덩치 하나가 택시에 밀어 넣었던 건 생각난다. 주소는 누가 말했던가……. 덩치가 지무의 주소를 알 리 없으니 지무 자신이 말했겠지. 기억에는 없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몸뚱이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을 굴려 저 너머 벽에 소중히 걸려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고생과 고통으로 패인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부모님의 얼굴은 그분들의 본래 나이보다 십 년은 더 들어 보였다. 힘겹게 몸을 굴려서 엎드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꿈틀댈 때마다 밀려드는 고통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면서, 힘겹게 기었다. 벽에 손을 짚고 바동바동 몸을 일으켰다. 유리에 굳은 핏자국을 남기며 간신히 액자를 떼어낸 순간 그를 버티게 하던 기력이 끊기며 바닥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대로 웅크리며 액자를 품에 안았다. 싸움을 하고 다쳐서 들어올 때면 울면서 치료해주던 어머니와 담배만 피시던 아버지. 자식에게 화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두 분의 모습에 더욱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을 누군가를 패면서 풀었다. 그러다 다시 다쳐서 집에 들어가고, 다시 어머니는 울면서 치료해주고 아버지는 담배만 피시고……. 일방적으로 팰 수 있는 실력이라도 되면 오죽 좋을까. 그럼 더 이상 그 꼴을 안 봐도 됐을 텐데. 그래도 다칠 때면 집으로 갔다. 평소에는 시답지 않은 가출도 잘해놓고는 다치기만 하면……. 외로웠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갔던 게 아니다. 그저 외로웠기에, 혼자인 게 싫었기에, 다친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 그들뿐이기에……. 그래서 부모님을 찾았던 거다. 결국 부모님께 가지는 애착도, 혼자는 싫다는 철부지 심보에서 비롯된 곁다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유치한 주제에 멋대로 상처를 주고, 또 받았다. “젠장…….” 눈물이 쏟아진다. “젠장…….” 죄송하다. 죄송하다.죄송하다. 죄송하다. ……그래도 혼자는 싫다. -똑똑. 정중한 노크소리가 지무의 상념을 깨뜨렸다. 최후의 기력을 뽑아낸 직후이기에 지무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어차피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방세는 이미 냈으니 주인집 아줌마일리도 없다. 저러다 가겠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잠근 기억이 없다. 문이 열렸다. 방에 들어오지 않고 벽을 더듬어 형광등을 켰다. 갑작스런 빛에 눈이 아파와 감아버렸다. 한참이 지나도록 누군지 모르는 방문객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절한 척이나 하고 있을까? 괜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저러다 가겠지. 훔쳐갈 것도 없는데. 형광등은 여전히 켜 있는데 문이 닫혔다.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다가와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두근거렸다. 상처를 확인하려는 지 따뜻한 손바닥이 지무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어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멀어진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챙기는 소리에 지무는 속으로 웃었다. 훔쳐갈게 있긴 있었나 보다. 다 챙겼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대신 고저 없이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라.” “……!” 전혀 예상 밖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강진이었다. 깊고 고요한 흑색 눈동자를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것이 현실임을 천천히 깨달은 지무는 점점 서러워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전 대리출석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 “그 지무 형님이란 사람 대신 맞기까지 해야 되는 거였습니까?” “…….” ‘서지무’라는 사람은 철저하게 보호했다고 한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 돈까지 뿌려서 시간표를 조작하고, 옥상에 모셔놓고 시종까지 붙여주고, 싸움판에는 절대 끼지 못하게 하고, 그래놓고도 짱으로 대접하라고 강요하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호하고 공경했단다. 지무는 학교에 간 첫날에 끌려가 맞았다. “제가 알고 있던 계약과는 꽤 많이 틀리군요.” “…….” 답하지 않는 강진에게 더욱 화가 끓어 넘쳤지만 어디까지나 침착한 척 따졌다. 공연히 대들었다가 한 대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일 등교는 해야겠지요? 계약이니까.” “…….” 강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동요 없이 지무를 내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곤 문 쪽으로 걸어가며 짧게 명령했다. “나와.” 이제 죽었구나, 지무는 액자를 부둥켜안고 잠시 떨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겨우 진정했다. 굳이 죽이려면 방 밖으로 끌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비틀비틀 기어서 나오는 데,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던 강진이 그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지켜보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지무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일으켜 세웠다. 이어서 지무의 한쪽 팔을 자기 어깨에 두르고 부축해 주었다. 강진의 뜻밖의 호의에 긴장이 풀려버린 지무는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발을 딛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지무를 보고 강진은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숙여 지무의 무릎 쪽에 다른 손을 밀어 넣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일명, ‘공주님 포즈’로 안겨버린 지무는 당황했지만 손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어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의 한쪽 손이 강진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던 터라, 서로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강진의 품은 단단했고, 또 따뜻했다. 그의 손바닥처럼. 잠에게 깨어난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 기척에 민감한 편이 못 되는 지무가 잠결에 알아차릴 정도로 집요한 시선의 주인은 단정한 외모의 여자였다. 나이는 대충 20대 초반 정도? 짙은 흑발에 무테안경을 쓴 여자로 눈매가 날카로웠다. 지무와 맞먹을 정도의 장신인 몸은 늘씬했지만 부드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처녀와 사냥꾼의 신, 아르테미스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매력이 있었다. 어찌 보면 여성스럽고 어찌 보면 남성스럽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는 지무가 깨어났음에도 문가에 기대어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지무는 더듬더듬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에는 답하지 않고 지무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펴 본 여자는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곧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강진! 나와 봐!”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굳이 따지면 중저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침대 위에서 눈만 껌뻑이던 지무는 그 고함에 퍼뜩 정신이 들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몸에 붕대가 단단히 감겨있었고, 얼굴에도 반창고의 감촉이 났다. 몸을 더듬더듬 만져서 상태를 확인한 지무는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 곳을 한번 둘러보았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커다란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어와 충분히 주위를 살펴 볼 수 있었다. 푹신한 침대와 그 옆에 스탠드가 놓여진 탁자, 창문가에 놓여 있는 러브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붙박이 장롱이 다인 인간냄새 없는 썰렁한 방이었다. 그렇다고 여관이나 모텔 등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지무는 당황해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이곳이 어딘지, 언제 이곳에 왔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대문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차의 뒷좌석에 눕혀졌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강진! 얼른 나와!” “……뭐야?” 잠기운에 취해 약간 쉰 목소리. 강진이다. 아는 목소리가 들린 것에 안도하며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좀 전까지 지무를 뜯어보고 있던 여자가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상태로 지무를, 정확히는 지무가 있던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시선은 강진에게 꽂혀 있었기 때문에 지무가 나온 건 몰랐을 것이다. “저 떨거지 뭐야?” “떨거지?” 자다가 나왔는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은 상태로 문에 기대어서 있던 강진이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손님방에 있는 놈 말이야.” “아아.” 손을 내리고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본 강진은 나와 있는 지무를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지무는 왠지 긴장 되서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강진은 감흥 없는 눈으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지무.” “뭐?” “저 놈 이름. 지무 형님 대리출석자. 그제 말했잖아.” “아, 그 놈? 근데 대리출석이면 대리출석이지 왜 이름까지 따라해?” 그 말에 지무는 인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제 이름도 서지무입니다!” 여자는 지무를 한번 흘낏 본 뒤에 강진에게 물었다. “진짜야?” “진짜야.” “그럼 저 놈이 우리 집에 있는 이유는?” 그 말에 지무는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제 지애라는 여자가 그러지 않았던가. 누나도 같이 살고 있다고. 동시에 이곳이 어딘지도 알았다. 강진의 집……. “다쳐서 데리고 왔다.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지. 잠이 안 깨는군.” 눈가를 문지르면서 주방으로 가는 강진의 뒤를 그의 누나라 추정되는 여자가 얌전히 따라갔다. 지무는 어찌 해야 할지 판단이 안서서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블루마우틴?” “단 게 좋아. 아이리쉬 떨어졌어?” “남았어.” 이어서 물소리가 났다. 까득까득 돌아가는 소리도 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도 났다. “잰 안 들어오고 뭐한데?” 여자의 질문에 강진의 답은 없었다. 지무는 망설이면서 그들이 간 방향으로 가보았다. 코너를 꺾자 지무가 깬 방보다 큰 주방이 보였다. 맞춤으로 짜 넣었는지 버려진 공간 하나 없이 효율적이면서 깔끔한 주방이었다. 창문 쪽에 붙여져 있는 식탁위에는 세 개의 플레이스 매트가 놓여져 있었다. 의자는 네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 여자가 앉아있었다. 강진은 저편에 놓여 있는 커피메이커 옆에 기대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지무를 돌아보고 턱짓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 앞에 앉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동안 커피 향이 가득히 퍼져 나왔다. 세 개의 잔에다 커피를 따라온 강진은 여자 옆에 앉아 말없이 자신의 몫을 마셨다. 달짝지근한 향에 홀려 지무도 한 두 모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몸 안에 퍼지는 느낌이 훈훈하고 평온하여 긴장이 다소 풀렸다. “통성명부터 하지.” 반 정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강진은 잠이 깼는지 아까보다 멀쩡한 소리를 냈다. 눈빛도 평소의 날카로우면서 진중한 빛으로 돌아갔다. 창밖을 계속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지무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강유. 성이 강, 이름이 유다. 강유라고 불러. 유라고 부르면 죽을 줄 알아.” “서지무입니다.” “한자 뭐 쓰냐?” “예? 아……. 지식 지, 힘쓸 무요.” “흠. 뜻이 구닥다리군.” 그 말에 지무는 발끈했지만, 강유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매서운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곤 강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게 왜 우리 집에 들어와 있는 건데?” “다쳤다. 지무 형님을 노리던 것들에게.” “흥, 주제를 알아야지.” 강유는 그제야 자신의 컵을 들어 입에 댔다.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저거 다친 거랑 우리 집에 들인 거랑 무슨 상관이지?” “더 다치면 학교 나가기 힘들 테고, 슬슬 과외도 시작해야 하니까.” 그리고 잠시 턴을 주었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곳에 내버려두기도 그렇고.”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에 그 말은 강유에게도 지무에게도 뚜렷이 닿았다. 지무는 동정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두근거림도 있었다. 저 냉혹해 보이는 얼굴빛에 동정이라는 온화하고 풍만한 감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 형만 한 아우 없다했던가. 강진보다도 누나 쪽이 한층 냉정했다. “그럼 따로 방 얻어주던가. 왜 이리로 데리고 왔어?” “아플 때 혼자 있는 건 괴롭다.” 뜻밖에도 그 말에 강유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인상을 쓰며 지무를 흘낏 보았다. 지무는 더욱 붉어져 버린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내가 가르칠 놈이 저 놈이야?” “그래.” “예?” 알 수 없는 대화에 지무가 불쑥 끼어들었다. 자신의 일이니 당연했다. 설명은 강유가 했다. “곧 기말고사라며? 이 몸이 특별히 시간 투자해 주는 거니까 운 좋은 줄 알아.” “제, 제가 시험까지 치러야 하는 거였습니까?” 딴에는 어이가 없어서 물어 본거지만 둘 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지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괜히 할 일 없어서 대리출석자 구한 줄 알아?” 강유의 말에 지무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그 지무 형님이란 사람은 항상 수석이었다면 서요? 그런데 제가 시험 쳐서 성적 깎아먹어도 됩니까?” “안되지.” 강유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곤 지무가 안도할 틈도 주지 않고 다음 말을 꺼냈다. “당연히 네가 시험 쳐도 수석이어야지. 지무님의 화려한 경력에 누가 되는 일이 없게.” “지, 지무 ‘님’이요?” 자신이 수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보다도 ‘지무님’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강하게 박혀들었다. 20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왜 17살짜리 고교생에게 ‘님’자를 붙일까? 모든 사람에게 까듯이 대하는 여자라고 보기에는 지무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냉랭하다. 그런 태도를 보면서 강진이 익숙하게 듣고 있다는 것은 평소에도 저 모양이란 뜻이 아닌가. 황당해 하는 지무를 보며 오히려 강유가 더 황당해했다. “그럼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 오빠라고 하리?” “가, 강진 선배는 형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강진은 특별 케이스.” 힘들게 한 반박은 일말의 가치도 없이 짓밟혔다. 지무는 더욱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지무 형님이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님’을 붙입니까? 형님이라 불리는 건 싸움을 잘해서인가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넌 앞으로 죽어날 각오나 해. 미리 말해두지만 난 엄해.” 그제야 자신이 수석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돌린 지무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전 중학생 때 100등 안에 들었습니다. 잘해봐야 50등 안이었고요. 고등학교 교과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는데, 벼락치기 며칠 만에 수석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죽기 싫으면.” 강유의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협박이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후……. 무리입니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집에 가서 가방을 챙겨야 되니 서둘러야겠군요.” “닥치고 앉아.”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며 강유가 나직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제 만났던 지애의 몇 십 배는 될 듯한 위압감이 압축되어 녹아져 있었다. 무시하기에는 후환이 두렵고, 따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나가지도 않았지만 강유의 명령대로 앉지도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지무에게 강진이 말했다. “학교는 당분간 갈 필요 없다. 여기서 몸 회복하면서 공부해.” “설마 강진 선배도 저에게 수석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은 강진은 슬쩍 고개를 들어 지무를 보았다. 위치상으로는 올려보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내려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처음부터 수석은 무리겠지.” 그 말에 강유의 얼굴이 삐딱선을 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10등 안에 들어라. 그걸로 봐주지.” 그리곤 강유를 돌아보았다. “기말고사까지는 2주 남았다.” “흠……. 좋아. 10등 안으로 봐주지.” 강유는 미간을 모으다가 결국 인심 썼다는 투로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당사자인 지무의 의견은 듣지도 않았다. 그것에 지무는 분개했다. “절대 무리입니다!” “무리, 무리, 무리!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백날 무리 찾다가 그 모양 그 꼴로 죽고 싶냐? 근성 없는 새끼!” 강유가 버럭 소리 질렀다. 강진이 마무리 지었다. “교과서는 호인이 가지고 올 거다. 문제집은…….” “아아. 내가 알아서 살 게.” 강유의 대답을 듣고 난 강진은 자신의 잔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강유의 독설에 주먹을 꾹 쥔 채 서 있는 지무의 옆을 지나쳐 싱크대로 걸어갔다. 강유는 창문 밖을 보며 느긋하게 커피 향을 즐겼다. 수치심과 소외감, 그리고 분노로 눈앞이 새까매진 지무에게 강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자도록 해. 아직 움직이는 건 힘들 테지.” 그리고 강유에게 물었다. “아침은?” “먹어야겠지? 넌?” “생각 없다.” 강유는 쿡쿡 웃었다. “그래서 아침 거를 생각이야?” “…….” 강진은 옅게 한숨을 쉬고 돌아서서 가스렌즈 쪽으로 갔다. 그리고 냄비에 불을 켰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강유가 아직도 멀뚱히 서 있는 지무에게 손짓했다. “앉아. 먹고 자.” 마이페이스인 두 남매 덕에 심적으로 녹초가 되어버린 지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넌 요리 할 줄 아냐?” “못합니다.” “쳇. 재주 없는 녀석.” 투덜대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쨌거나 넌 나한테 2주간 교육받아야해. 그동안 여기 있는 건 용납해주지. 시험 끝나면 바로 나가.” 순순히 끄떡였다. 그러면서 내심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본래라면 당장 뛰쳐나갔을 텐데 왜 2주간 이곳에서 노골적인 냉대를 받겠다고 한 걸까? 혼자 있기 싫어서? 강유의 독설이 가슴에 꽂혀서? 아니면……. 호인이 온 것은 강진이 옥수수 스프를 끓이면서 프렌치토스트를 굽고, 그 옆에서 강유가 오렌지와 생강, 설탕물을 이용해 드레싱을 만들 때였다. 참고로 지무는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벨소리가 들리자 강유가 재빨리 수돗물에 손을 씻고 달려갔다. 강진은 프라이팬을 들어 불에서 떼어놓고 현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강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지무는 우연찮게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강진의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 데 강유가 맥 빠진 목소리를 냈다. “뭐야, 호인이냐?” 그 말에 강진은 한숨을 쉬며 프라이팬을 다시 불 위에 올려놓았다. 집안을 메우던 긴박감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지무는 전보다 더욱 초조해져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 쪽으로 나갔다. 자신의 교과서를 들고 왔을 호인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코너를 돌기 직전, 지무는 강진을 돌아보았다.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곧은 등만이 보였다. 갑자기 어제 지애에게 맞은 자리가 아파왔다. 입술을 깨물고 코너를 돌았다. 열려진 미닫이 문 너머로 교과서 뭉치를 들고 들어오는 호인이 보였다. 강유는 인터폰 옆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문 잠그고 들어와라.” “예.” 퉁명한 말투였지만 호인은 느긋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일단 교과서를 거실 안에 밀어 넣고 나서 현관문을 잠그고, 신을 벗고 들어왔다. 현관과 거실을 구별하는 미닫이문까지 닫고 나자 강유는 낮게 투덜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무님인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릴까 말까한 작은 목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똑똑히 들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지무를 향해 호인이 물었다. “어디다 들여놓으면 되는 거냐?” “아……. 그쪽 방.”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가리키며 그에게 걸어갔다. “고맙다.” “뭘.강진 형님이 시킨 건데.” 선을 긋는 듯한 말이라 지무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호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쨌거나 살아 있어 다행이다. 어제 너랑 같은 반이라는 놈이 와서 너 끌려갔다고 말 할 때는 너 죽는 줄 알았어. 핸드폰은 꺼져 있고. 일학년 놈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거 봤다고 하고.” “학교에서 일 벌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더라.” 농담조로 말하면서 얼른 다가가 호인에게서 짐을 받아들려 했다. 호인이 됐다며 고개를 젓고는 방문이나 열라고 했다. “윤호 선배가 끌고 갔다면서? 그 선배는 잘 안 움직이지만, 한번 하면 딱 죽기 직전에서 멈추거든. 그래서 다들 안 건드리려고 하지.” “끌고 간 건 윤호라는 사람인데, 때린 건 지애라는 여자야. 엄청 세더라. 손이 맵다, 수준이 아니던데?” 호인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간 인상 쓰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쳇. 윤호 선배답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지애 선배였나.” “그 지애라는 사람, 강진 선배를 좋아하는 거 같더라?” “좋아해.” 선뜻 고개를 끄떡이며 답한 호인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애 선배는 강진 형님이 입학했을 때부터 첫눈에 반했어. 윤명고뿐만 아니라 같은 바닥에 있는 놈들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얘기야. 강진 형님은 상대해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괜찮았어. 지애 선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강진 형님의 관심 밖 대상이었으니까. 지무 형님이 입학하시고, 강진 형님이 지무 형님을 특별시 할 때부터 상황이 얽혔지.” “저…… 그 ‘지무 형님’이라는 사람 말이야. 어떤 사…….” 힘들게 질문을 쥐어짜내는 데, 강유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빨리 와 거들어! 굶긴다!?” 얼떨결에 아침을 얻어먹게 된 호인은 크게 감동한 얼굴로 연신 감탄했다. “정말 맛있네요! 특히 이 샐러드! 소스가 새콤하고 좋아요!” “네가 뭘 좀 아는 구나! 귀여운 자식! 자자, 많이 먹어. 소스 마음에 들면 싸줄까?” “앗! 그래도 됩니까?” 아부가 아니라 정말 마음에 들었던 건지, 호인은 기쁜 얼굴을 했다. 어제 그와 주고받았던 ‘5단 찬합’이 생각난 지무는 가볍게 물었다. “너 만약 5단 찬합 싸온다면, 네가 만드는 거냐? 너희 어머니가 만드는 거냐?” 호인도 가볍게 답했다. “어머니.” “……못 먹을 요리냐?” “요리라는 단어를 감히 붙일 수 없는 물체다.” “…….” 호인은 샐러드를 자기 접시로 푹푹 담아가며 짧게 덧붙였다. “미맹이시거든.” “으흠…….” 그때 딱 잘라 거절하길 잘했다. ‘먹을 수 있다면’을 운운하던 호인에게 까닭 모를 기쁨의 오라를 느낀 탓에 거절했던 건데……. “차라리 내가 만들어 먹고 싶은데, 아버지는 사내가 무슨 부엌이냐며 죽이려 들어서.” “호오. 그런 미개인이 아직도 절종하지 않고 남아 있었군.” 강유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호인은 쓰게 웃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 “아!” 스프를 떠먹던 강유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유호인. 너도 수업 끝나면 이리 와서 저 놈이랑 같이 과외 받아.” “예?” “너 지무님한테 공부 배웠었잖아.” “예. 그런데 그게 왜……?” 토스트에 샐러드를 얹던 호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그때만큼 성적 낼 자신 있으면 안와도 되고.” “절대 불가능하죠.” 호인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강유는 씩 웃었다. “난 지무님의 공백을 느끼고 싶지 않아. 어떤 것으로든! 그러니까 잔말 말고 오라면 와.” “예.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지만…….” 호인은 지무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강유를 보고 말했다. “강유 누님께 너무 부담이 되는 건 아닌지…….” “괜찮아. 괜찮아. 하나나 둘이나. 그럼 오늘 당장 시작하자. 토요일이니까 일찍 끝나지? 점심 먹여줄 테니 곧장 와.” “오늘은 안돼.” 말없이 먹기만 하던 강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강유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호인도 묻지는 않았지만 궁금한 기색이었다. 강진이 짧게 답했다. “학교 정리할 거다. 오늘, 내일. 주말 중으로 끝낸다.” 그러면서 지무를 한번 보았다. 그럭저럭 준수한 얼굴이 퉁퉁 붓고 반창고투성이 되어 있었다. “출석 도장 찍을 때마다 저 꼴이 되어선 곤란하니까.” 지무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격한 무언가가 치솟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새끼. 병 주고 약주고 하네. 빌어먹을 새끼…….’ 강진과 호인이 학교를 가고, 강유는 문제집 사러 간다고 외출했다. 그 사이에 지무는 집안을 구경했다. 강유, 강진 남매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였다. 한 가구가 한 층 전체를 쓰는 고급 아파트. 넓은 거실, 네 개의 방, 하나의 욕실 겸 화장실, 허브가 심어져 있는 테라스의 정원, 모든 게 갖추어진 주방, 전자동 냉온시스템 등등…….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집안을 보며 비현실적이라 느껴 차라리 무덤덤했던 지무는 화장실을 보고나서야 울고 싶어졌다. 부모님과 지내던 단칸방만한 했던 것이다. ‘방도 한번 볼까?’ 주인 허락 없이 보는 건 찔리긴 했지만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혹에 굴복한 지무는 아침에 강진이 나왔던 방문을 열어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의 한 벽면은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베이지 톤의 청결한 커튼이 쳐져 있어 방안 전체가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더블은 될 것 같은 커다란 침대와 노트북이 놓여져 있는 책상. 벽의 삼분지 일은 될 법한 유화. 그 옆에 보이는 또 다른 문은 아마도 욕실이겠지.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곳 말고도 각 방마다 구비 되어 있는 건가? 음, 내가 있던 방에도 욕실이 있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기도 했다. 조심조심 또 다른 문을 열어보았다. 복도형태의 드레스룸과 맞은편의 미닫이 유리문이 나타났다. 붙박이 형태의 농을 공연히 열어보았다. 몇 중으로 걸려져 있는 명품 옷들은 놀랍지도 않았다. 미닫이 유리문도 열어서 한번 들어가 보았다. 둘이 들어가도 충분할 듯한 넓은 욕조가 바닥에 깎여 들어가 있었다. 저편에는 샤워부스까지 있었다. 세면대에는 아침에 막 사용한 듯한 면도기와 스킨, 로션 따위가 보였다. “젠장.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욕실에서 나와 드레스룸을 통해 다시 강진의 방으로 들어왔다. 쫓기는 심정으로 방에서 나오려는데, 유화가 걸려져 있는 벽의 맞은편 전체에 짜여져 있는 붙박이 농이 눈에 띠었다. 처음에는 옷이 걸려있으려니 했는데, 드레스룸이 따로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문을 열어보았다. 접이식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은 책장이었다. 엄청난 수의 책이 빽빽하게 꽂혀져 있었다. “쳇…….” 공연히 기분이 상해서 문을 거칠게 닫고 나와 버렸다. 시작만 어렵다고 했던가. 지무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방으로 향했다.강유가 준비하고 나섰던 방은 보지 않기로 했다. 여자는 자신의 영역에 민감하니까, 어떤 식으로 걸릴지 알 수 없다. 또…… 그다지 흥미가 나지 않기도 했다. “어……!?” 잠겨 있었다. “‘서지무’……방인가.” 자신들의 방은 무방비하게 내버려둬 놓고는 ‘서지무’의 방은 꽁꽁 감쳐둔 건가……. 맥이 빠져버린 지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지무는 곧장 한차례 둘러보았다. “아! 있다!” 또 다른 방문. 집 넓이에 비해 화장실이 하나밖에 안되는 게 이상하다 했는데, 각 방마다 딸려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또 다른 방문을 열어보자 세면대와 수세식 변기가 전부인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세면대 옆쪽으로 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손님방이다, 이건가…….” 강진의 방과는 비교대상조차 안되는 자신의 거처에 지무는 쓰게 웃었다. “그 ‘지무’의 방은 어떨까?” 킥킥대다가 침대에 앉았다. “미친 새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친 새끼.” 그러면서 뒤로 누우려는데 창문가에 놓여져 있는 러브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낯익은 물건이. 일어나서 다가가 보자, 역시나 지무의 가방이었다. 어제 강진이 챙기던 것들인가? 안을 열어보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과 속옷이 있었다. 그 와중에 이런 것까지 생각했나 싶어 웃음이 났다. “생긴 거 하고 너무 안 어울려, 강진 선배.” 가방을 내버려 두고 돌아서려는데, 의자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물건이 보였다. 지무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하하! 정말 안 어울려, 강진 선배!” 그것은 부모님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였다. 어제 지무가 부둥켜안고 있었던. part 2. 박혀있는 돌 지무는 생각했다. 꿈만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도, 그 날 강진을 만난 것도, 학교에 갔다가 일진들에게 끌려가 구타당한 것도 다 드라마틱해서 차라리 꿈만 같다. 가장 비현실적인 것은 강유의 독설 속에서 공부하는 자신을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켜보고 있는 강진이다. 그리고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인 그의 시선에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자기 자신이다. “알아듣겠냐? 물어 볼 거 있음 해.” “예. 이 문제…….” “아아, 그건 공식만 대입하면 금방이야. 잘 봐.” 생각보다 훨씬 우수한 호인은 지무에 비해 강유의 예쁨을 받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무에 비해서지만 말이다. 지무는 한숨을 푹 쉬고 자신의 앞에 두껍게 쌓여있는 프린트들을 바라보았다. 자칭 족집게 선생 강유가 반드시 나온다며 전부 외우라고 던져준 녀석들이었다. 커피를 다 마셨는지, 강진이 주방으로 향했다.강유가 대뜸 주문했다. “나 캐러멜 카페 모카 한 잔! 캐러멜 듬뿍 뿌려서.” 그리곤 호인에게도 물어본다. “넌 진한 거 좋아하지? 에스프레소로?” “아, 저, 제가…….” “됐네. 강진이 잘 만든단 말이야. 넌 기껏해야 다방커피일 거 아냐?” 맞는 말이라 호인은 우물거리며 반쯤 일으켰던 몸을 앉혔다. “저, 그럼 커피 말고 얼음물…….” 아무래도 형님으로 모시는 강진이 상대인지라 마음대로 주문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시원한 게 마시고 싶은 거냐?” “예, 졸려서…….” “그럼 아이스커피로 해. 강진, 호인이는 아이스커피.” 그리고 지무를 가리키며 멋대로 추가했다. “이 놈은 진하게 에스프레소! 보통보다 배는 진하게 해! 자면 안 되니까.” “저도 시원한 게 먹고 싶습니다만…….” “그거 다 외우면 먹어.” “윽!”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서서 주문이 끝나길 기다렸던 강진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지무는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겨우 해방되었다. 특별히 자신을 집요하게 본다든가 관심을 보인다든가 한 것도 아닌데, 그의 존재만으로도 긴장이 되어버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유의 설명을 척척 알아듣는 호인을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지무가 본래대로 진학하여 차근차근 공부를 해나갔었다 해도 호인보다는 열등했을 것이다. ‘저 놈도 난 놈이야. 쳇.’ 잘난 놈이 도처에 널려 있어 살맛이 안 났다. 진지한 눈으로 연습장을 보고 있는 호인의 얼굴은 전에 없었던 반창고가 몇 개 붙어 있었다. 옷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왼 쪽 팔뚝에도 붕대가 감겨져 있다. 강유의 지시대로 월요일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온 호인은 붓기가 빠지지 않은 흉한 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지무에게는 한 문장으로 모든 걸 설명했다. “이제 안심하고 학교 가.” 좀 더 소상히 듣고 싶었지만,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여 참았다. 문제 풀이가 끝났는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며 눈으로 풀이과정을 훑어보던 호인이 주방 쪽을 흘낏 본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캐러멜 카페 모카가 뭔가요?” “응? 아아, 축출한 커피에다, 우유랑 모카 가루를 넣고 데운 것을 섞어서 캐러멜 시럽을 넣은 뒤 생크림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캐러멜 시럽을 뿌리는 거야. 말로 하니 복잡하네. 해보면 간단해. 난 그거 달아서 좋아!” “강진 형님이 그걸 할 줄 아세요?” “그럼. 커피하면 강진이지.” 킥킥대며 덧붙였다. “지무님이 커피를 좋아하시거든.” 지무는 공연히 흠칫했다가 프린트 내용에 집중했다. 얼마 후 강진이 커피를 내왔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호인이 강유의 커피를 신기하게 보다가 결국 한 모금 얻어먹는 것도 보지 않았다. 왼쪽에 놓여진 커피잔이 완전히 식어버릴 때까지. 커피를 내준 뒤, 강진은 곧장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 자는 건지, 아니면 달리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늦은 저녁준비는 강유와 호인이 맡아서 했다. 지무에게는 그거 도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보라고 타박을 주었다. 이 참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배워두고 싶다며 열성을 보이는 호인은 강유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관심 속에서 지도받았다. 물론 그녀의 성품답게 스파르타식 교육이었지만 호인은 악착같이 버텼다. 그만큼 굶주렸다는 뜻이리라. “초보 주제에 눈대중으로 하려 하지 마! 거기 계량스푼 써!” “네. 이거죠?” “그래. 큰 쪽으로 세 스푼. 흔들지 말고 그냥 넣어. 흔들면 보통의 분량보다 더 들어간다. 이제 이거 뒤적거려봐.” “예!” ……그날 저녁은 잡곡밥과 감자된장국, 버섯양파볶음, 해파리무침과 겉절이였다. 식사를 하고 나서도 몇 시간 더 공부를 하던 호인이 자정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집으로 갔다. 지무는 아직도 몇 시간 더 공부해야 했다. 호인을 보내고 문을 잠근 강유에게 마침 물통을 채우기 위해 나왔던 강진이 물었다.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인 건가?” “귀엽잖아! 사내놈이 부엌에 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의 아버지 밑에서 저런 아들이 나오기 얼마나 힘든데.” “결국 신부수업 중이다, 이거군.” 본의 아니게 옆에서 듣게 된 지무는 강유가 호인과 자신에게 보이던 태도가 어째서 그리도 틀렸는지 깨달았다. 강유는 웃으면서 얼굴을 쳐들었다. “나한테 시집오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왜? 후배한테 매형소리 하기 싫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좋은 애니까 가지고 놀지마.” “후후.” 강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불만이면 지무님을 나한테 주던가.” “…….” 강진의 얼굴이 굳었다. 지무는 몸을 움츠렸다.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위압감이 두 맹수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물러선 것은 먼저 도발한 쪽이었다. “농담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너에게서 지무님을 뺏을 생각은 없어.” “…….” 진심임을 읽은 강진은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지무님은 어찌됐든, 네가 지무님 것이라는 건 옛날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말이지.” 강유는 여유 있게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지무에게로 다가왔다. “그럼 얼마나 했는지 볼까? 프린트 덮어.” 지무는 암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중간 테스트 시간이 된 것이다. 지무가 학교에 다시 간 것은 정확히 기말고사 첫날이었다. 시험 전날 주는 기말고사 힌트는 호인이 알아서 낚아왔다. 분석하는 것은 강유의 몫이고, 지무는 말 그대로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강진이 같은 집에 있기 때문에 호인이 아침에 올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강진은 새벽같이 나가버리고 호인을 기다렸다 같이 식사를 하고 나섰다. 1반이 중앙의 현관문 바로 왼편이고, 5반이 왼쪽 끝에 있기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호인이 지무를 교실까지 데려다 주는 꼴이 되었다. “싹 정리했으니 별 일 없을 거다. 시험 끝나면 바로 올 테니까 기다려.” “그래. 솔직히 지금은 선배들보다 시험이 걱정이다. 강유 누님이 날 잡어 먹으려들 텐데…….” 호인은 피식 웃었다. “강유 누님이 좀 엄하긴 하지.” “……너한테나 좀이지. 너한테나.” 투덜대며 교실로 들어섰다. 시험 때문에 일렬로 떨어져 있는 책상들을 그립게 보며 출석번호를 곱씹어 보았다. “32번이니까 내 자리가…….” “여기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한 말인지 몰랐다. 2주 전에 들어왔을 당시 다들 책상에 머리 박느라 바빴던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이봐! 여기라고.” 다시 한번 불려진 다음에야 자신에게 한 말임을 안 지무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대를 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그 놈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지무와 눈이 마주치자 대뜸 자신의 뒷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출석번호 32번. 내가 31번이거든.” “…….”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길이 없어 묵묵히 그가 가리킨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강유가 만들어준 최종 프린트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자기 공부할 생각은 않고 지무 하는 꼴을 멀뚱히 보고 있던 앞 번호 놈이 불쑥 물어왔다. “콜라 안 쏘냐?” “……?” 뭔 헛소리인가 싶어 올려보자, 놈이 재차 묻는다. “난 강진 선배한테 가서 알렸는데. 콜라 안 쏠 거냐고.” “……아!” 그때 그 놈! 지무가 알아보자 놈은 싱긋 웃으며 통성명했다. “난 민수다. 박민수.” “난 서지무. 말해두지만 내 원래 이름이 서지무야.” “헤에……. 명찰 볼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진짜 서지무야? 동명이인이구나.” “명찰?” “응. 너 이외의 대리출석자들은 명찰 안 달았거든. 근데 넌 ‘서지무’라고 새겨진 명찰을 달고 있잖아. 아무리 대리출석자라해도 그쪽 녀석들은 따르는 형님 이름을 함부로 써먹지 않으니까.” “잘 아는 것 같다?” “윤명고에서는 기본이지. 특히 그 ‘서지무’는 우리 반이기도 했으니까.” 민수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솔직히 너 그날 이후로 안 나타나기에 병원에 입원이라도 한 줄 알았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전치 2주는 아니었나봐?” “어디 금 간 곳 없이 깔끔하게 맞고 끝났다.” “깔끔이라…….” 민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재꼈다. “너 그렇게 가고 난 뒤에 학교가 한바탕 뒤집어졌었다. 깔끔하게 끝나긴 했구나. 방해물은 전부 박살나고 끝났으니.” 악의는 없는 듯 명랑하게 말한 민수는 앞으로 몸을 돌렸다. “자자, 공부하자! 앞으로 삼십분이다!” “잠깐만!” 지무는 민수의 어깨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급히 물었다. “전부 박살나다니?” “응?” 민수는 눈을 껌뻑이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몰라?” “난 공…… 몸 추스르느라 바깥 사정은 하나도 못 들었거든. 전부 박살이 나다니?” “‘서지무’ 잠수 타고나서 살기뿌리고 다녔던 선배들 다 병원에 있어. 강진 선배가 웬일로 ‘서지무’ 이외의 사람 때문에 날뛰었다고 말들이 많은 걸.” “…….” 멍하니 있던 지무는 불현듯 시원시원하게 민수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콜라 언제 쏠까?” 첫날 시험을 다 끝내고 복도의 벽에 기대서서 호인을 기다리는 데, 누가 바로 옆에 탁 기대섰다. “……?” 호인이 올 방향이 아니기에 상대를 돌아본 지무는 순간 굳어버렸다. 윤호였다. “여어!” 한쪽 손을 쓱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아직 흐릿하게나마 멍 자국이 남아 있는 호인과는 달리 반창고 하나 안 붙여져 있는 깔끔하고 단정한 그의 모습에 지무는 더욱 긴장하고 말았다. “아직 제게 용무가 남아있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그쪽이 있는 거겠지.” 그리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2주 전에 뺏겼던 지무의 핸드폰이었다. “아……!” “일 끝나면 준다고 했는데 그땐 줄 정신이 없었지 뭐냐. 다음날 주면되겠지, 했는데 내내 학교에 안나오고. 꽤 신경 쓰였다고, 이거.” 건성으로 집어던지는 것을 놀라서 얼른 두 손을 뻗어 받아들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절 기다릴 필요 없이 호인에게 전해줬으면 됐을 텐데…….” “너한테 할 말도 있었고.” 양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윤호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거나 내 귀염둥이 때문에 폐 끼치게 된 건 미안하다. 난 ‘지무 형님’라는 놈은 못 봤으니 모르겠지만, 네 놈이 그 놈하고 비슷한 뭔가가 있었나보지. 지애가 그렇게까지 눈이 뒤집힌 걸 보면. 그래도 강진하고 완전히 끝장날까 무서워 많이 봐준 거다. 뼈 부러진 데는 없지?” “예.” 윤호의 말은 거기서 끊겼지만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아직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한 손은 바지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쓱 들어 보이며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던 호인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몸을 바로 했다. 나란히 서 있었던 윤호가 지무보다 작고 말랐기 때문에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히 인사하는 호인에게 윤호도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여어. 다친 데는 거의 다 아문 모양이군. 좋아 보이는데?” “예.” 윤호는 반동을 주어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반쯤 몸을 돌린 상태로 지무를 보았다. “서지무.” “예?” “너 변했다.” “예?” “느낌이 달라졌어. 2주 전과. 좀더 태연한 척하는 게 능숙해졌다고 할까? 처세술에 불과했던 것의 가치가 커진 모양이야?” 그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지무는 미간을 모았다. 윤호는 피식 웃고 경고조로 말했다. “넌 대리출석자다. 난 낯짝도 모르는 ‘지무 형님’이란 작자의 대리출석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예. 압니다.” 윤호의 한쪽 입가가 쓱 올라갔다. “정말 알고 있는 거냐?” “예.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럼 됐고.” 더 볼 일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 가버리는 윤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호인에게 물었다. “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지 않았어?” “윤호 선배는 제외됐다.” “어째서?” 쉼표 없이 바로 쏘아붙이듯 묻는 지무가 뜻밖이었는지 호인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원한이 있었나?” “그건 아니지만…….” “가자. 시험은 내일도 있다. 강유 누님께서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실 거야.” 호인은 가볍게 지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앞 서 걸어 나갔다. 지무는 개운치 않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인간승리였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숫자. 뒤집어도 같고 세워도 같은, 매력적이고 완벽하고 균형 있는 숫자. 지무는 황홀한 눈으로 길쭉한 네모꼴 종이를 보듬어보며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만 해라. 미친 새끼 같다.” 민수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무슨 인연인지, 시험이 끝나고 책상도 자리도 원 위치했음에도 여전히 지무의 앞자리였다. 자신의 성적표 따위는 진작 구겨서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은 그는 지무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거슬리는 지 자꾸 짜증을 냈다. 아마 성적이 떨어진 모양이다. 지무는 더욱 환희에 넘친 웃음을 지어주었다. “으흐흐흐흐!” “크아악! 그만 해!” 결국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지만, 지무는 그 와중에도 히죽대느라 바빴다. “너도 전교 8등 해봐라. 내 꼴 안 나고 배기나.” “쳇!”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지 혀만 차댔다. 지무는 성적표에 새겨져 있는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해죽댔다. “아아, 반에서 8등해 본적은 있어도 전교에서 8등이라니! 흐흐흐.” “젠장! 한 턱 쏴!” “미쳤냐? 나 같은 영세민에게 얻어먹고 싶어? 너도 전교 10등 안에 안 들면 죽여 버리겠다고 옆에서 칼 갈고 있는 마녀 옆에서 공부해봐! 젠장.” 말하다보니 열 받는다. 나만 따라오면 돼, 라고 말한 강유의 말이 사실로 입증됐으니 할 말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뭐야, 과외 받았냐?” “과외라는 사치스러운 단어가 절대 안 어울리는 시간을 보내다 왔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민수는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만 하고 있었다. “며칠 고생하고 전교 8등할 수 있으면 뭔들 못하겠냐?” “……가늘고 길게 살아라. 길게.” 지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10등 안으로 늘여줬지만 다음에는 수석이란 말이야. 젠장. ‘지무 형님’이란 놈은 왜 공부를 잘해가지고…….” 대충 사정을 들었던 민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였다. “‘서지무’가 괴물단지이긴 했지.” “그래?” 지무는 망설이다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꺼내보았다. 강진이나 강유에게는 엄두도 못 냈고, 호인은 자세한 것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 “저……‘서지무’라는 녀석은 어떤 녀석이었어?” “…….” 생긴 것도 모른다. 출석부에 사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쳐봤지만 녀석의 것만 떼어져있었다. 고의인 것 같았다. 강진의 방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 것도 같았지만 도둑도 아닌데 남의 방을 뒤져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무가 생각하고 있는 ‘서지무’의 대략적인 이미지는 김현서와 비슷했다. 강진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섬세한 모범생정도?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강진은 어찌됐든 저 강유마저 ‘님’자를 붙일 것 같지는 않다. 민수의 답을 기다리면서 입안이 말라가는 걸 느꼈다. 초조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모르겠다.” 오랜 시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민수가 꺼낸 말은 고작 저거였다. 맥이 풀린 지무가 결국은 울컥하는 데, 그게 끝이 아닌 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놈이었다. 우리 반은 학년 초에 정해진 자리에 그대로 계속 앉아서, 내내 난 이 자리고 ‘서지무’는 뒷자리였어. 그런데 바로 뒤에 있는 그 놈의 존재를 느껴본 적은 그다지 없었다.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공간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어깨를 움츠렸다. “강진 선배가 처음부터 놈을 보호했던 건 아니다. 그건 같은 반에다, 바로 이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던 내가 잘 알아. 신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도 안됐을 무렵이었나? 수석으로 입학해서 안 그래도 관심이 대상이었던 ‘서지무’ 놈이 며칠간이나 무단결석을 했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지. 놈이 결석할 당시에는 길길이 날뛰던 담임도 그 꼴을 보고 내버려 뒀어. 몸이 안 좋아서 빠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리고 일교시가 거의 끝나갈 무렵…….” 민수는 목소리를 짐짓 낮추고,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공개하는 양 은밀하게 속삭였다. “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는 아니고, 혼자 작게 쿡쿡거렸지.” “그게 뭐 어때서?” 뭐 대단한 일이라도 목소리를 낮추는지. 뚱하게 받아치는 지무를 보며 민수는 정색을 했다. “난 그때서야 놈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 전에는 있어도 몰랐는데, 놈이 내 뒤에 앉아 있구나, 라고 갑자기 생각하게 됐지.” 지무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삐졌는지, 몸을 돌렸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얘기 듣느라 수고하셨수.” “앗! 왜 이러시나, 민수도령. 오오! 놀라워요, 놀라워!” 얼른 몸을 돌려서 자신을 보게 만들고 그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다행히 입이 근질근질 했었는지, 많이 조르지도 않았는데 바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놈이 쿡쿡 웃는데, 막 누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리고 수업중인데 문이 쾅 열렸지. 강진 선배였다.” 민수는 신나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멀리서만 봤던 그 윤명고 짱이,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그 강진 선배가 땀투성이가 되서 헐떡이며 반에 들어오는데. 담당 선생도 주눅 들어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어. 다들 놀라고 긴장하는데, 다시 쿡쿡하고 놈이 웃었다. 그건 나하고 강진 선배만 알거야. 강진 선배는 바로 소리를 질렀지. ‘어떻게 된 겁니까?’.” 말투까지 흉내내가며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일학년 때 학교는 물론 이 일대를 평정한 그 강진 선배가 우리 반 놈을 아는 것도 놀라운데, 존댓말을 했더란 말이지. 더 놀란 건 놈의 대답이었어. ‘들은 대로다’. 세상에 반말이라니! 강진 선배는 더 말하지 않고 놈의 팔을 잡아끌어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우린 저 놈 이제 죽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신음을 흘리면서 어깨를 움켜쥐더라? 난 가까이에 있어서 볼 수 있었는데…….” 다시 소리를 낮췄다. “피가 나오고 있었다.” “……!” “그 뒷일은 몰라. 강진 선배가 당황해서 손을 놓았고, 놈은 자진해서 교실 밖으로 나갔어. 그 뒤로 갑자기 놈이 짱이 되었고 강진 선배는 죽기 살기로 놈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지.” 지무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에서 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을 거 다 들었으면 그만 가지.” “……!”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호인이 팔짱을 낀 채로 뒤에 서 있었다. 여전히 느긋하고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아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는 민수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주고 일어났다. “오늘은 강진 형님도 함께 가신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계셔. 내가 들어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강진 형님은 지무 형님 이야기 도는 거 싫어하시니까.” 교실을 나오면서 호인이 낮게 말했다. 지무는 멋쩍게 웃다가 물었다. “왜 같이 가는 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일은 일이지.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니.” “……!” 들라는 등수 안에 들었음에도 조건반사적으로 긴장하고 말았다. 2주간의 악몽이 준 영향이 이토록 막대했다. 그 모습을 본 호인은 짓궂게 물었다. “몇 등인데?” “……그러는 넌?” 길다면 긴 학교생활을 통틀어 처음 받아본 고득점을 좀더 극적으로 밝히고 싶어져, 답을 미뤘다. 호인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잘 봤다. 시험지 보는 순간, ‘역시 강유 누님이구나.’ 싶더라. 나온다는 데에서는 다 나왔어. 매일 과외 받고 싶어지더군.” “……난 받고 싶지 않아. 가늘고 길게 사련다.” “뭐가 가늘고 길게냐?” 호인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댔다. “아무리 강유 누님이 잘 가르친다 해도, 2주간 공부해서 그 정도면 너도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니야.” “에?” 기대치 못했던 호평에 지무는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볼을 긁적이며 실실 웃다가 앗,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정도라니? 너 내 등수 알아?” “아니.” 민수나 이놈이나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데 뭐 있다. 허탈해 하는 지무에게 호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얼굴이 밝은 걸 보니 10등 안에 들었다는 건 알겠다. 강유 누님의 손에 죽는 건, 면했구나. 그럼 잘 갈아둔 칼의 역할은 만두소 만드는 걸로 낙찰이군.” “만두?” “응. 내가 냉동만두 외의 만두는 못 먹었다고 했더니, 수제 만두의 진가를 보여주신다고 오늘 오랬어. 물론 만드는 건 같이 지만. 난 고등학교 졸업하면 반드시 나와서 살 거야. 그 정체불명의 물체를 더 먹고 살았다간 서른 되기 전에 죽어버릴걸.” “흐음…….” 잘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야심에 불타오르고 있는 강유를 뻔히 알고 있는 지무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넌 강유 누님을 어떻게 생각 하냐?” “왜? 강유 누님께 관심 있냐?”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 마녀는 논외지.” 호인은 씩 웃을 뿐, 뭐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글쎄다. 아. 강진 형님!” 현관 맞은편에 있는 화단 앞에 우뚝 서 있었던 강진이 호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자기들끼리 소곤대며 강진을 훔쳐보는 여자들이 곳곳에 있었다. 개 중에는 남자도 있었는데, 그 놈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강진은 주위 시선에 흥미 없는 듯 먼저 앞장서 걸어갔다. 그 뒤를 한 걸음정도 거리를 두고 지무와 호인이 따랐다. “멋지다…….” “후우. 교복을 입어도 저렇게 근사한데 사복을 입으면 어떨까?” “까악! 보고 싶잖아!” 여자들의 수다를 우연찮게 들어버린 지무는 강진의 드레스룸에 잔뜩 걸려져 있었던 명품 옷들을 떠올리며, 그것을 입은 강진을 상상해 보았다. 같은 남자임에도 순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했다. 강진은 의외로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매일 수업과 자율학습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왔다. 방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며 서류 따위를 읽었다. 듣자하니 회사에서 꽤 중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다 마시면, 냉장고에서 350㎖짜리 물통을 꺼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갔다 온 뒤, 아침을 차려서 먹고, 방에 들어간다. 시험기간 중에 알게 된 거지만, 아침은 강진이나 강유, 둘 중 먼저 일어난 사람이 하다가 다른 사람이 합류해서 함께하는 데에 반해 점심은 반드시 강진이, 저녁은 강유가 했다. 설거지는 요리를 안 한 쪽이 했다. 커피를 끓이는 것은 항상 강진이고, 생주스나 파르페 따위를 만드는 것은 강유였다. 둘의 생활에는 딱 집지는 못하겠지만, 일정한 규칙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 그 안에 지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가장 불규칙해 보이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강유가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면박을 주어 포기했다. ‘아, 이제 시험도 끝났고 성적표도 나왔으니 해도 상관없겠다. 좀 있다 말해봐야지. 요리는 호인이 배울 때 곁다리로 배우면 되겠지.’ 자신의 역할이 생길 것 같아 지무는 싱글 웃었다. 강유와 강진은 남매간의 애정 따위를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는 성격이긴 했지만, 서로 함께 있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공기가 떠돌았다. 그것이 지무를 그들에게서 밀어내어 거리를 만들었다. 그 탓에 때때로 혼자 있을 때보다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강진 형님. 강유 누님께서 올 때 요리 재료 사가지고 오라고 명단 주셨는데요.” 상설 매장을 지날 때, 호인이 불쑥 말했다. “전 사가지고 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강진은 고개를 끄떡이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지무는 호인에게 물었다. “살 거 많아? 같이 갈까?” “아니. 몇 개 안돼. 그리고 넌 얼른 가서 성적 보고해야지.” 그리곤 답도 듣지 않고 혼자 매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저벅저벅 걸어가는 강진을 뛰다시피 해서 따라붙은 지무는 슬쩍 한 걸음 거리를 메우고 강진의 옆모습을 올려보았다. 강진은 지무가 뒤에서 쫓아오건, 옆에서 따라오건, 아예 오지 않건 상관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고, 경비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금방 띵, 소리가 나며 은색 문이 열렸다. 층수를 누른 강진은 그대로 오른 쪽 구석에 섰다. 지무는 그 뒤쪽으로 서서 강진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은색 문에 비친 것인지 강진이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있나?” “……!” 강진이 먼저 말을 걸어올지는 몰랐던 지무는 당황해서 불쑥 물었다. “정말로 저 계속 있어도 되는 겁니까?” “……?” “선배 집에 신세지는 것 말입니다. 민폐 끼치는 거 아닙니까?” 원래라면 시험이 끝난 날 나왔어야 했던 집이다. 강유는 노골적으로 축객령을 내렸었다.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돌아온 지무에게 왜 이리 왔냐고 대뜸 물었던 것이다. 몸도 다 나았고 시험도 끝났으니 더 이상 ‘우리 집’에 있을 필요 없지 않냐고. 그래도 2주간 부딪긴 사이인데 그렇게 냉정하게 잘라낼 줄은 몰랐던 지무는 기분이 상해서 짐 챙기러 왔다고 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함께 들어온 호인이 짐 꾸리는 걸 도와주었다. 호인은 당연히 오늘 짐 챙겨서 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듯 했다. 아쉬운 듯이 이제 이곳에 못 오겠다고 중얼거리며, 그래도 2주간 배울 수 있을 만큼은 배워뒀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고 덧붙이는 걸 보면 말이다. 감시라도 하듯이 문에 기대 서 있었던 강유가 그 말에 놀라 왜 못 오냐고 물었고, 호인은 새삼스러운 걸 물어본다는 듯이 답했다. 지무가 있으면 그의 자잘한 신변을 도와야 하니 떳떳한 출입이 가능하지만, 그가 없으면 더 이상 강진 형님의 일상에 끼어들 수 없으니 올 수 없다고. 그리하여 지무는 아직도 강유와 강진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직 양육이 덜 된 호인의 성장을 위해 강유가 지무를 묶어둔 것이다. 강유의 육아일기가 끝나면 다시 가차 없이 쫓겨날 테지. 요즘 강유와 호인 사이에 흐르는 달달한 분위기를 보면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 했기에 지무는 늘 초조했다. 다시 혼자가 된다는 공포에 눈앞이 깜깜해질 때도 있었다. 강진은 입술을 깨물고 긴장한 채 답을 기다리는 지무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착각하고 있는데, 널 붙잡은 건 누나다. 민폐는 누나 쪽이 끼치고 있는 거지.” 냉랭한 음성이었지만 가슴 한쪽에서 온기가 스며 나왔다. 다음 말이 있기 전까지는. “호인이 마음을 정할 때까지, 혹은 누나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만 있어라. 네 방 값은 내고 있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가도 되고, 원한다면 방을 얻어주겠다.” “…….”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내놔.”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강유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던 지무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성적표를 건네주었다. 목표는 분명 달성했음에도 그녀의 손에 성적표가 쥐어지니 긴장이 되었다. “어?” 성적표를 펴보지도 않고 강유는 의아한 소리를 냈다. 그리곤 지무를 무서운 눈으로 보며 물었다. “호인은?” “누님이 재료 사오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자기가 시켜놓고 잊었나싶어 나름대로 성의껏 답변했건만 강유의 얼굴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네가 들고 와야지! 내가 괜히 방과 후에 사오라고 한 줄 알아? 얼른 안 튀어가?!” 지무는 애당초 이 경우를 생각 못한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하며 순순히 돌아섰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기에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내려갈 수 있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는데 막 단지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호인이 보였다. “어이!” 짧게 부르며 그에게 뛰어갔다. 강유라면 저 위에서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나왔냐?” “강유 누님한테 쫓겨났다. 너 혼자 들고 오게 했다고. 줘. 이젠 내가 들을게.” 양 손에 쥐어져 있는 짐을 전부 빼앗아 들었다. 호인은 굳이 사양 않고 손을 탁탁 털었다. “별로 무겁지 않은데…….” 그러면서 위쪽을 대충 없이 올려보았다가 씩 웃었다. “쫑알거리는 여동생만 있다가, 이리 챙겨주는 누님이 계시니 좋군.” “좋기는 개뿔이. 독재자에 탄압자에 독설가에…….” “멋지잖아.” 호인은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지무는 가슴이 철렁했다. 불쌍한 중생 하나가 저리 가는구나. “너 자신의 취향이 독특하다는 건 알고 있냐?”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강유 누님 인기 많아. 멋지지, 똑똑하지, 늘씬하지, 요리 잘하지. 또 속된 말이지만 집안도, 학벌도 좋지. 이 집에 출입하면서 내가 선전포고를 몇 번 당했는데.” “선전포고?” 일층에 멈춰져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호인이 층수를 눌렀다. 그리고 강진과 마찬가지로 그 앞에 섰다. 지무는 왼쪽 문가에 섰다. “공부하고 집으로 가는 데 갑자기 앞을 막아서더니, 강유 누님과 무슨 사이냐고 캐묻더라고. 학교 선배의 누님이시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날 회유하려 들더군.” “그래서?” “일 없다고 했더니 길길이 날뛰더라. 처음부터 뒤에서 습격하는 놈도 있었지. 반 죽여 놨지만.” “……한두 놈이 아닌 거냐?” “매번 달랐어.” 지무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이 미쳐가는 구나.” “쿡쿡.” -띵! 열리는 문 사이로 나가는데, 호인의 혼잣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너만 하겠냐.” “뭐?” “아니다. 아무 것도.”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강유와 강진이 서서 성적표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둘이 들어온 것을 모르는 지,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8등이라. 어쨌든 목표는 아슬아슬하게 성공인가.” “…….” “뭐야?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진심이었군.” “뭐가?” “유호인. 지무 형님과 관련된 성적표를 앞에 두고도 녀석을 먼저 챙겼다.” 강유는 태연하게 웃었다. “뭘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곤 당당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 쪽을, 정확히는 호인에게 시선을 맞추며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답을 했다. “내가 일부러 신부수업 시켜주는 놈, 호인이 말고 본 적 있어? 딴 것들은 배워오기 전에는 내 앞에 알짱대지 말라고 했지. 눈치 채려면 진작 눈치 챘어야지, 둔한 놈아.” 강진은 희미하게 웃고는 몸을 반쯤 돌렸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지무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화들짝 정신이 든 지무는 먼저 걸어가는 강진의 뒤를 쫓았다. 강유와 호인,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강진의 방까지 따라 들어와 버린 지무는 깊게 숨을 뱉어냈다. 좀 전에는 숨소리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강진은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마이를 벗어 침대 위에 가볍게 던져놓았다. 조끼도 벗어서 그 위에 던져놓고, 넥타이를 풀어 마찬가지로 던져놓았다. 답답한지 단추를 두개 풀고, 쌓여져 있는 교복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멀뚱히 서 있는 지무에게 책상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책상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은 지무는 거실로 통해 있는 문을 힐끗 보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을까요?” “아마도.” “호인도 싫다고는 안했지만…….” “싫다고 해도 안 통한다. 누나가 가지겠다고 작정한 걸 못 가진 건 하나뿐이다.” 무엇이라고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지무는 그 하나가 ‘지무 형님’임을 알았다. 왠지 긴장이 되서 문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약 강유가 작정하고도 가지지 못한 두 번째가 호인이 된다면……. 입안이 말라와 헛기침을 몇 번 하자 강진이 나직이 말했다. “책상 위에 물 있다.” 이어지는 종이 마찰음이 신경 쓰여 돌아보자 강진이 지무의 성적표를 보고 있었다. 마침 다 봤는지 본래대로 반으로 접고 일어났다.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그가 공연히 부담스러워 마른침을 삼켰다. 강진의 목표는 지무가 아닌 책상이었던 모양이다. 책상 위에 성적표를 올려놓고 잠시 그것을 내려보는 모습이 한없이 진지해보였다. 교복을 건성으로 던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무는 멍하니 올려보았다. 문득 강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맹수의 것과 같은 냉혹하고 매서운 눈동자가 이때만큼은 우아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그 부드러움에 지무는 더욱 멍해져서, 자신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 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강진을 바라보았다. 그 묘한 시선이 거슬릴 법도 한데, 강진은 뜻밖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지만 호의적인 웃음이었다. “잘했다.” “……!” 당황한 지무는 눈을 크게 떴다. 금세 자취를 감춰버린 매혹적인 웃음에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두근두근, 귀 바로 옆에서 심장이 전속력으로 뛰어댔다. “아……!” 힘겹게 입술을 벌려,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어, 스스로도 모를 어떤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 “강진! 나와!” “…….” 강진은 느닷없는 호출에도 의아한 기색도 없이 돌아서서 거실로 통해 있는 문으로 갔다. 그 미련 없는 뒷모습을 보며 지무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거칠게 튀어나오려는 심호흡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지금 무슨……!?’ “안 나가나?” 강진의 무감정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지무는 얼른 일어나, 열려진 문으로 걸어갔다. 호흡은 어찌어찌 진정됐지만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강진은 지무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긴 했지만 관심 없는 눈으로 그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무가 자신을 지나쳐 거실로 나오는 순간에도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듯 곧장 문을 닫았을 뿐이었다. 강진과 지무, 둘이 모두 거실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강유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표했다. “호인이 내 꺼 하기로 했다.” 호인은 강유의 옆에서 쿡쿡 웃고 있었다. 그가 너무나도 불쌍해진 지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강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덤덤히 고개를 한번 끄떡이기만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강유와 호인은 딱히 애정표현이랄 것은 하지 않았다. 사귀기로 한 지 하루도 안 된 신선함이라고 치기에는, 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편안하고 조용했다. 마치 평생을 함께 한 노부부처럼 말이다. 지무는 아침은 자신이 하면 어떻겠냐고 묻으려 했던 것을 삼켰다. 호인이 강유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이제 그는 나갈 일만 남은 것이다. 강유는 물론 강진까지도 그렇게 못을 박았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요리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강유 자신이 장담한 대로 ‘수제 만두의 진가’다운 맛을 가진 만두였음에도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넓고 깨끗하고 따뜻한 집에서 다시 단칸방의 작고 초라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국물을 조금씩 마시면서 강유가 축객령을 내릴 때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데, 의외로 아무 말도 없었다. 호인을 가지게 된 것이 기뻐서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호인은 지무의 생각만큼 불행한 상황에 처한 게 아닐 지도 모른다. “플레이스 매트 하나 더 사야겠다. 호인 꺼로.” 강유의 말에 호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동자는 기쁘게 웃고 있었다. 지무는 별 뜻 없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플레이스 매트를 바라보았다. 강진과 강유의 식단 밑에만 깔려 있는 두개의 베이지색 플레이스 매트. ……두 개? “세 개 아니었습니까?” “…….” 만두를 반으로 쪼개던 강진의 손이 멈췄다. 호인에게 만두를 맛있게 먹는 법을 직접 보여주고 있던 강유가 그런 강진을 보며 지무에게 답했다. “세 개야. 내 것, 강진 것, 지무님 것.” “하지만…….” “지무님이 안 계셔서 치웠어. 지무님 것을 딴 사람이 쓰게 할 수는 없잖아.” 평소보다도 몇 배는 차가운 목소리로 답한 강유는 지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은은한 살기까지 담겨있는 눈동자로 경고해 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무는 그런 강유보다도 옆에서 무거운 동작으로 만두를 쪼개는 강진이 더 무서웠다. 무섭고 미안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처음부터 이 둘은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음을 지금에야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호인을 위해서 곧장 준비하려고 하는 플레이스 매트. 그것은 이곳의 ‘구성원’이라는 상징인 것이다. 그것을 저 둘은 지무가 사용하지 않게 미리 치워놨다. 이보다 뚜렷한 선이 어디 있겠는가. 외롭다. 눈앞에 지무의 이상향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안에 지무가 들어갈 장소는 없다. 지무에게 베풀어진 최대의 아량은 그것을 지켜보는 것뿐. 지무는 부모님이 부고를 들었을 때와 같은 암담함을 느꼈다. 지무의 발언으로 인해 그라는 존재를 깨닫게 된 듯, 강유가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넌 오늘 짐 쌀 거냐?” “…….” 형태는 질문이지만 명백한 명령이었다. 지무가 힘들게 입을 열려 하는데 강진이 끼어들었다. “방을 얻어줄 거다. 그때까지만 있어.” “방? 저 놈이 얻어 달래?” “아니. 이번 시험 결과에 대한 대가다.” 지무는 강진의 저 말이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쁜 것은 그가 외로웠던 탓일 것이다. “뭐, 좋아.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의외로 쉽게 물러난 강유는 단, 하고 토를 달았다. “내일은 오지 마.” “예?” “내일은 여기 오지 말라고. 하루 밖에서 자고 와. 하루 신세질 친구 정도는 있겠지? 없으면 호텔 가던가. 어쨌거나 내일은 오지 마.” 갑작스런 상황에 처하게 된 지무에게 호인이 친절을 베풀었다. “우리 집으로 와라. 시끄러운 여동생이 수학여행 중인 덕에 부모님만 계시니까 조용하다.” “고맙다.” 그러자 강유가 툭 끼어들었다. “넌 내일 나랑 첫 데이트해야지!” “아, 그렇군요.” 호인은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 지무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 아버지가 한 성격하시긴 하지만 아들 친구까지 잡지는 않을 거야. 어머니가 옆에서 조율해주실 테고. 내일 수업 끝나면 데려다 줄 테니까 내 방에 들어가 있어.” “……고맙다.” 굉장히 불안하긴 했지만, 이제와 여관 간다고 하면 호인의 친절을 무시하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만두소가 될 온갖 재료를 다지고도 건재한 저 칼이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겠지. “근데 호인인 시험 결과 어때?” 선생으로서 당연한 질문을 하는 강유에게 호인은 지무에게 보였던 태연자약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전보다 잘 봤어요.” “너 20등 안에는 들지? 그 정도 실력이던데.” “예. 지무 형님 덕에…….” 무심코 그 이름을 입에 담은 호인은 말끝을 흐리며 강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유라는 든든한 편이 있었다. “이번엔 몇 등 했어?” 강유는 다른 질문을 함으로써 호인을 곤혹 속에서 구해냈다. 예전부터 지무와는 다르게 대했지만, 이제는 아예 천지차이였다. 그것에 억울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지무는 지극히 덤덤했다. 강유가 지무를 특별히 싫어해서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호인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들은 지무를 대할 때처럼 대하면서 오직 호인에게만은 자상하게 대하는 강유는 남자인 지무의 눈에도 매우 근사하게 보였다. 여성스러운 수줍음과 부드러움, 온화함, 자애로움과는 다른 자상함. 오히려 무척 남성스럽다. 강유가 예쁘다는 표현보다 멋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강한 위엄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것일 테지. 호인은 든든한 연인에게 눈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던지며 답했다. “2등이요.” “……!” 지무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호인을 보았다. ‘젠장. 이 놈도 난 놈이야. 일학년 짱 먹을 정도로 싸움 잘하고, 생기기도 잘생겼고, 공부까지 잘해? 앗, 저 놈 성격도 좋잖아!’ 지무가 하늘의 불공평함을 한탄할 때, 강유는 대견하다며 호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누나가 잘 가르쳐주셔서 그런 거지요. 나온다고 하신 데에서 다 나왔는걸요. 계속 과외 받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당연히 계속 받아야지! 난 머리 나쁜 놈 싫어.” “이런. 버림 받지 않으려면 노력해야겠는 걸요.” “하하! 괜찮아. 요리처럼 내가 다 가르쳐 줄 테니까, 따라오기만 해.” 저 둘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특별하다. 서로에게 서로가 특별하다. 지무는 한층 깊은 고독을 느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호인의 아버지는 어제 급히 출장을 갔다고 한다. 외간 남자랑 단 둘이 있게 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대며 어머니도 데리고 갔다고 한다. “분명 부부동반 여행 간 거야. 출장은 무슨 출장.” 호인은 웃으며 덧붙였다. “어쨌거나 잘 됐지? 편하게 있어.” “고맙다.” 인사를 하면서도, 요즘 자신의 처지가 우습게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냉소를 지었다. 그런 지무를 지켜보던 호인은 나직이 말했다. “오늘 지무 형님 생신이시다.” “……!” 그 말로만 듣던 ‘서지무’가 오는 건가? 그래서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오라고 한 건가? 역시 구성원이 아니기에 생일에 초대되는 멤버에서 제외된 거로군. 지무는 창백하게 질려서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서지무’가……. 강진의 절대적 보호를 받는 그 ‘서지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 지 대충은 알겠는데…….” “…….” “착각이다. 지무 형님이 오실지 안 오실 지는 아무도 몰라. 연락이 없었으니까. 강진 형님 혼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래. 원래는 강유 누님도 함께 있을 예정이었지만 이젠 빠져주겠다고 하시는군.” 그렇게 말하며 호인은 웃었다. “강유 누님은 지무 형님을 좋아하셨던 모양이야.” “……!” 그건 지무도 알고 있었다. 강진의 ‘지무 형님’이기에 빼앗지 않는 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특별함의 급이 높은 거겠지. 어쩌면 호인보다도 더……. 울적한 가정에 지무는 호인의 눈치를 살폈다. 호인은 평소와 똑같은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 마음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강유 누님 스스로가, 자신의 ‘지무님’을 넘을 가능성이 있기에 내게 손을 뻗은 거라 생각한다. 첫 술에 배부르겠어?” “마음은 변할 수 있다…….” 무심코 그 말을 입에 담아보는 지무를 묵묵히 보던 호인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꼿꼿이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지무 형님’은 어떤 사람이냐?” “……?” “온실 속 화초? 강진 형님의 절대적인 보호 속에 있는 모범생? ……혹은 강진 형님의 연인?” “……!” 지무는 마지막 말에 눈을 부릅떴다. 호인은 여전히 앞만 보며 말했다. “그때 다친 건 일진들 때문이 아니었다.” 호인이 말하는 ‘그때’가 어제 민수에게 들었던 학기 초를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줄곧 그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날리던 녀석들끼리 신경전 벌여가면서 위로는 1학년 때 학교를 장악한 강진 선배의 정체를 파악하려 기 쓰느라 한창인 그때, 고작해야 수석으로 입학한 녀석 따위 관심 밖의 존재였다. 우리가 지무 형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한 것은 강진 형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선언 이후부터다.” “그럼 왜 다친…….” “몰라.” 호인은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답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단지, 그때 다친 상태였던 지무 형님과 강진 형님이 옥상으로 가던 중에 3학년 일진을 만났던 건 확실해. 트러블이 있었겠지.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사건 당사자들인 3학년은 그 날로 전학을 가버렸고 사건은 오리무중. 그 직후 지무 형님이 다시 보름 정도 병결했기 때문에 놈들에게 당한 게 아니냐는 소문은 잠깐 돌았었다. 강진 형님이 옆에 있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이견에 묻혀버렸지만.” 호인은 잠깐 간격을 뒀다가 덧붙였다. “나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간격을 뒀다가 정정했다. “아니. 헛소문이야.” 한숨을 깊이 쉬고 양 팔을 바지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호인은 결국 직설적으로 뱉어버렸다. “소용없다고!” “……뭐가?” “지무 형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최대한 지무 형님을 따라하려고 해도 소용없다고.” “……!” 지무는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빠드득 이를 갈았다. 호인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잘해봐야 대용품이야. 내 경우를 보고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고 희망 갖지 마. 난 나로서 가치가 있지만, 넌 그 상태로 가치를 갖게 된다 해도 대……!” “닥쳐!” 악을 박쳐 고함을 지른 지무는 증오로 일그러진 눈으로 호인을 노려보았다. 호인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중간하게 굴렀던 피라미 싸움꾼을, 일대를 장악한 학교의 일학년 짱이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닥쳐! 닥치라고 했어!” “그래봐야 넌 강진 형님 눈에 안 들어가.” “닥……!” 고함을 지르던 상태로 굳어버린 지무는 불안정하게 비틀거렸다. 호인이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뿌리쳤다. 그리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너도 똑같아.” 지무는 차갑게 말했다. “너도 딴 놈들과 똑같아.” “……?” “너도 내 이름은 부르지 않아.” 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녹슨 그네가 앞으로 삐그덕, 뒤로 삐그덕, 무게감 있는 소리를 냈다.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놀던 꼬마들도 저녁노을이 깔릴 때 즈음 되자 명랑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흩어졌다. 지금은 지무 혼자다. 그네에 앉아 그냥 앞으로, 뒤로……. 시계추마냥 왔다, 갔다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강진의 아파트가 보였다. ‘왔을까?’ ‘서지무’라는 소년. 동명이인. 얼굴도 성격도 목소리도 키도 체격도……. 아무 것도 모르는 같은 이름의 소년을 지무는 처음부터 질투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완벽한 맹수가 ‘형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자신의 야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봤을 때부터. 지무를 보고 노골적으로 냉기를 뿜어댔을 때부터. 질투하고 있었다. 부러워하고 있었다. 저 특별한 맹수에게서 특별한 취급을 받고 있는 같은 이름의 소년을. 처음부터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견고한 끈에 끌려버렸으니 억울해 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강진은 어찌됐든 ‘서지무’는……. ‘넌 버리고 갔잖아. 강진 선배를…….’ 그토록 한결같은 그 사람을. 지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견고한 방어막을 아무렇지 않게 뛰쳐나가 놓고, 다시 멋대로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인 건가. 그래도 그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강진은 안도해 하겠지. 행복해 하겠지. 지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네가 들썩이며 마지막 쇳소리를 냈다. ‘넌 버리고 갔잖아. 멋대로 상처를 냈잖아. 그러니까…….’ 지무는 강진이 ‘서지무’와 함께 있을, 혹은 ‘서지무’를 기다리고 있을 아파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돌아오지 마!’ 아파트의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불도 꺼져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곧 주위를 분간 할 수 있게 된 지무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최대한 주의해서 기척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지무’의 방문을 확인해 보았다. 열려있었다. 숨이 멈을 것만 같은 충격에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지만 버텨냈다. ‘온 건가? 온 건가?’ 그 생각만으로 반쯤 미쳐서 열려져 있는 방문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있을 ‘서지무’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는 머리 속에 없었다. 그저 원망스럽고, 부럽고…… 죽도록 외로웠다. “……!”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격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지무는 비틀비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서지무’의 방……. 넓진 않다. 강진의 방과 지무의…… 손님방의 중간 정도다. 창가에 세로로 붙어 있는 침대와 그 옆의 책상, 그리고 두개의 벽에 짜져 있는 책장이 전부인 방이었다. 옆에 문이 보였다. 욕실이겠지. 무언가에게 이끌리듯 그 문을 열어보았다. 역시 드레스 룸과 유리문……. 강진의 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다. 무심코 붙박이 농을 열어보려다 말았다. 도망치듯이 그곳에서 나와 충동적으로 방 한가운데에 섰다. 이곳이 ‘서지무’의 공간……. 학교에서도 있는 듯 없었던 그 ‘서지무’가 있었던 곳. 그리고 그가 돌아 올 곳. 주먹을 꾹 쥔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빌어먹을……!’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 강진 선배가 있다고 했었지!’ ‘서지무’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여 미처 강진을 생각해내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문고리에 한 손을 얹고 있는 그의 형상만이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어둠이었지만 그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그만의 위엄과 냉기, 그리고 그리움의 냄새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지무에게 강진이 물었다. “돌아 온 겁니까?” 강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서지무’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 미처 지무가 말을 꺼내기 전에 강진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지무는 죽도록 얻어맞을 거라 생각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온 몸이 훈훈해져 왔다. 강진이 그를 강하게 끌어안은 것이다. 지무는 그제야 강진에게서 독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음을 알았다. 역시 ‘서지무’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강진이 괴로움을 술로 달래려 한 것이다. ‘서지무’의 공간에 들어와 그리움을 달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지무를 ‘서지무’로 착각함으로써 버림받은 자신을 달래려 하는 것이다. 그 괴로움을 잘 알고 있기에 지무는 결국 강진을 마주 안았다. “지무 형님…….” 가슴이 아릿해질 정도로 그리움이 가득한 목소리. ‘서지무’를 향한 목소리다. 그것을 지금 지무가 훔치려 하는 것이다. “지무 형님…….” 알싸한 알코올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강진이 입술을 맞댄 것이다. 곧 촉촉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이 강진의 혀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흔히 말하는 달콤함, 나른함, 황홀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것이 얽히고 안을 핥아 내리는 노골적인 감각만이 존재했다. 그를 통해 강진의 술기운이 침투한 듯, 지무의 몸도 붉게 달아올랐다. 밀쳐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인간 서지무를 위해. 지무는 결국 강진의 어깨를 밀쳐내는 데 성공했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어깨에 손을 갖다 댄 것으로만 느껴지는 그 미약한 반항은 의외로 성공했다. 강진이 크게 얻어맞은 듯이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버린 것이다. 어둠 속에 지무와 강진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지무 형님…….” 불안한 듯 떨리는 음성. 그 애처로움에 지무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동시에 화가 났다. ‘난…….’ “지무 형님…….” ‘난 서지무야.’ “지무 형님…….” ‘난 서지무라고!’ 강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사 당할 것만 같은 무거운 걸음으로 지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힘겹게, 필사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지무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 했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그래도 피해야 했다. 그것이 지무의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마지막 긍지였다. 그러나……. “‘서지무’…….” 그 부름은 강인한 올가미가 지무를 동여맸다. 저 ‘서지무’가 자신을 지칭하는 게 아님을 앎에도 가슴이 내려앉아서, 기묘한 들뜸과 흥분이 밀려들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강진은 다시 한번 지무를 포박했다. “‘서지무’…….” “……!” 그의 두 손이 지무의 양 뺨을 감쌌다. 커다랗고 단단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따스하다. “‘서지무’…….” 서서히 다가오는 강진의 흑색 윤곽을 보며 지무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강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강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강진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그러니 지무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서지무’.” 저 목소리만……. 애틋하게, 서럽게, 처절하게, 그립게…….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무만을 부르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강진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모르기에, 저 지칭이 ‘서지무’를 향한 것임을 모른다. 강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기에, 저 지칭이 ‘서지무’를 향한 것임을 모른다. 강진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모르기에, 저 지칭이 ‘서지무’를 향한 것임을 모른다. 지무는 생각했다. 주장했다. 비명 질렀다. ‘난……! 나도 서지무야!’ 다시 닿아진 뜨거운 입술. 조심스럽게 윗입술에 닿았다 떨어지고, 조심스럽게 아랫입술에 닿았다 떨어진다. 그리고 더욱더 조심스럽게 와 닿아 안으로 스며든다. 서툴다. 여자를 안아본 경험이 제법 되기에 알 수 있었다. 서툴다. 키스라는 행위가 서툰 게 아니다. ‘서지무’를 향한 행위가 서툴다는 거다. ‘서지무’를 향한 첫키스일 지도 모른다. 지무는 손을 뻗어강진의 단단한 가슴에 갖다댔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좀 전과는 다른 호응……. 그것을 기다렸던 듯 강진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지무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내려 등과 허리를 끌어안고 강하게 당겼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안긴 지무는 손을 움직여 강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강진의 입술이 지무의 얼굴을 미끄러져 귓바퀴에 닿았다. 살짝 핥다가 깨물고 다시 미끄러져 목을 빨아들였다. “웃……!” 깨물렸을 때 움찔하여 나직한 신음을 흘린 지무를 어찌 생각했는지 지무의 몸을 뒤로 이끌어 침대에 눕혔다. 지무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보지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모를 것이다. 입술에 포개오는 입술, 눈꺼풀에 닿아오는 입술, 귓불을 관능적으로 어루만지는 손가락, 상의 안을 파고들어 가슴을 쓰다듬는 손바닥, 다리 사이로 들어온 무릎, 성기를 은밀히 자극하는 단단한 허벅지. ……그것들이 진정 닿고자 하는 주인이 누군지, 알려하지 않을 것이다. 뜨거웠다. 모든 게 뜨거웠다. 단지 그뿐으로, 열락도 흥분도 짜릿함도 없었다. 탐욕스럽게 파고드는 키스도, 부드럽게 가슴과 옆구리를 쓰다듬는 손바닥도, 벌어진 다리를 얹어 놓은 허벅지도, 성기에 직접적으로 닿아온 긴 손가락도. 모든 게 뜨거울 뿐, 지무에게서 쾌락을 자아내지는 못했다. 오직 그 목소리. “‘서지무’.” 오직 그 하나. “‘서지무’.” “하아……!” 그 하나에 모든 것을 내버린 채 강진에게 매달렸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주제에 정중하기 그지없는 애무를 하는 그에게. 취중에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특별함’을 보이는 그에게. 극치에 달한 애틋함을 필사적으로 내보이는 그에게. 그저 매달리고, 매달려서 모든 걸 잊으려 했다. “‘서지무’.” “아앗!” 괴롭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오직 그 하나에 모든 것을 잊었다. 모든 것을 내던졌다. 자신의 긍지마저도.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언제 깼는지는 뚜렷하게 났다. 지무의 몸에 포개어 잠들어 있던 강진이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본능적으로 깨어났고, 그 움직임에 지무도 깨어났다. 취중이라 정신이 없었던 강진과 생소한 행위에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던 지무. 때문에 둘의 은밀한 곳은 아직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윽!” 강진이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몸 깊숙한 곳이 꿈틀했다. 힘겹게 눈을 뜨자 강진과 눈이 마주쳤다. 빈틈없는 냉혹한 맹수의 눈동자가 지금은 멍하게 풀려있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 게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지무의 얼굴을 훑다가 점점이 붉은 가슴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도 그의 안에 들어있는 자신을 보았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강진을 보며 지무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진으로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지만, 지무는 모든 것을 알고도 외면한 채 그를 품었다.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피해자인 척 울며 가증을 떨까? 이제와 좋아한다고, 반했다고 고백할까? 최악의 아침을 맞고 있는 강진에게? “저…….” 지무는 말라붙어버린 자신의 입술을 몇 번이고 핥으면서 어떻게든 말을 꺼내보려 했다. 경직되어 있던 강진의 몸이 흠칫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려버렸다. 물론 고통의 신음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로 인해 강진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 입을 틀어막으며 벌떡 일어난 강진으로 인해, 이번에는 비명을 질러버렸다. 그와 맞닿아 있던 살점이 같이 몸 안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지무를 괴롭혔다. 그러나 강진은 비명을 지른 지무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토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피라도 토해내는 듯한 끔찍하고 섬뜩한 구토 소리에 지무는 자신의 고통을 잊고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문 너머,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을 강진 쪽을……. 언제까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토악질이 멈췄다.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구역질을 한다. 위액이라도 토하고 있겠지. 지무는 눈을 감았다. 어제처럼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싶었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치고는 낮은 편인 강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왔다!” 혹시나 올지도 모르는 ‘서지무’와 강진만의 시간을 위해 그녀 자신도 밖에서 자고 온 모양이다. 조용한 집안에 울리는 강진의 구역질 소리를 강유가 못 들을 리 없었다. “강진? 야!? 무슨 일이야!?” 강진은 답할 겨를도 없이 계속 쥐어짜듯 구역질을 했다. 약하고 물을 가져오겠다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 갔던 건지, 고함소리가 났다. “병신새끼! 술을 얼마나 처먹은 거야! 주량을 훨씬 넘었잖아! 너 주량 넘기면 완전히 필름 끊기잖아! 밥도 안 먹고 처마셨지? 그러니 속이 뒤집히지!” 그래도 동생이라고 약과 물을 챙겨서 화장실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은 이제 헐떡이고 있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응? 너 왜 옷은 홀딱 벗고 있냐?” 그제야 그게 보였는지 강유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소리에 강진은 다시 구역질을 했다. 강유는 침묵했다. 대신,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이곳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지무는 몸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축 늘어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힘겹게 이불을 끄집어 치부를 가리는 데는 성공했다. 정액으로 하체가 더럽혀져 있는 꼴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문가에 우뚝 선 강유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지무를 보고 있었다. 엉성하게나마 하체는 가렸지만 비릿한 정액 냄새는 뚜렷하게 감돌고 있었다. 차츰 강유의 얼굴이 매서워졌다.살인이라도 할 듯이 점도 높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방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오려는데, 쾅하고 문소리가 났다. 강유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희미하게 문소리가 이어졌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났다. 그리고 다시 쾅! “강진! 야, 어디가?” 옷을 걸쳐 입고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강진의 모습이 그녀와 문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강진은 뒤도 안 돌아보고 쫓기듯 나가버렸다. 강유는 그를 쫓아가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가 한숨을 쉬며 멈췄다. 혼자 있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동생을 쫓아가는 대신 지무를 돌아보았다. “너 강진이랑 잤냐?” “…….” 강유는 허, 하고 기가 막힌 탄식을 내뱉었다. “웃긴 새끼네, 진짜.” “…….” “너 거지새끼냐?” 지무의 눈매가 꿈틀했다. 강유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쏘아붙였다. “너 강진에게 동경 같은 거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절대 연애 감정은 아니었어. 그건 내가 잘 알지. 욕정 같은 걸 품고 있었다면 강진이 목욕하고 나왔을 때 들뜬 기색이라도 있었을 텐데, 넌 담백했거든. 강진의 몸을 보며 감탄하는 기색은 처음에만 조금 있었고. 그러던 놈이 같은 거 달린 놈한테 얌전히 안겨? 웃기네. 거지새끼. 너 지무님 안 계시는 틈에 지무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거잖아.” 지무는 이불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강유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긴 거겠지. 이 자리에 계속 있고 싶다. 특별 취급 받고 싶다. 안 그래? 꼴 같지 않게 지무님 흉내 낼 때부터 알아봤어했는데……. 씹. 내가 병신이지. 호인이 얻겠다고 동생을 판 꼴이 됐잖아. 빌어먹을.” 지무는 계속 침묵했다. 강유의 말은 한층 잔인해졌다. “강진이 덮쳤냐? 꼴을 보니 술 처먹고 지랄 부렸나보지? 지무님 찾는데, 네가 옆에서 깝죽댄 거 아냐?” “……야.” “뭐?” “나도 지무라고! 서! 지! 무! 한가할 서! 지식 지! 힘쓸 무! 서지무!” “알아.” 지극히 무성의한 강유의 답에 지무는 더욱 화를 냈다. “알긴 뭘 알아! 다들 날 가짜 취급하는데! 나도 서지무야! 윤명의 짱도 아니고, 전교 1, 2등하는 수재도 아니고, 그 새끼 형님도 아니지만! 나도 서지무라고!” “안다니까.” 쏘아붙이듯이 차갑게 받아친 강유는 문에 기댔다. “넌 서지무야. 단지 강진의 ‘서지무’가 아닐 뿐이지.” 순간 치밀었던 화가 식었다. 흥분도 식었다. 그리고 마음도 식었다. “강진이 범했다고 지랄하지 마. 그때 강진이 수작부릴 때, 눈앞에 있는 게 뭔지도 모를 정도로 이성을 잃었을 때, 넌 한마디만 하면 됐어.” “…….” 듣고 싶지 않았다. 침묵으로 강진을 유도한 것은 의도적이었던 거니까. 눈을 감음으로써 자신을 속이고 입을 닫음으로써 강진을 속였다. 알고 있었다.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더더욱 듣고 싶기 싫었다. 이토록 한심한 자신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강유는 가차 없었다. 지무가 강진의 ‘서지무’가 아니듯이 강유의 ‘지무님’ 역시 아니었으니까. “‘난 너의 지무가 아니다’.” 눈물이 맺히지도 않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강유는 일말의 동정 없이 결론지었다. “네가 강진을 범한거야.” 알고 있었다. 그 ‘서지무’를 부르는 입술에 스며있는 애틋함도, 그 ‘서지무’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에 스며있는 그리움도, 그 ‘서지무’를 끌어안은 몸에 스며있는 떨림도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가지고 싶었다. 이 남자만 가지면 나는 ‘서지무’가 될 수 있다. 하나 알려주면 열을 아는 천재나, 천성적인 자질 덕에 배우지 않아도 운동 잘하는 놈이나, 길가에서 모델 제의가 들어오는 미남은 될 수 없지만 ‘서지무’는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특별한 사람,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을 손에 넣은 ‘서지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강진을 범했다. 강진의 그리움과 절박함을 자신의 열등감과 외로움으로 더럽혔다. 강진의 사랑을 지무의 자기애로 더럽혔다. part 3. 굴러가는 돌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식사대신 우유를 마신 뒤, 호인과 함께 등교한다. 교실에 가서는 민수와 수다를 떨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점심시간이면 호인과 함께 매점에 간다. 이것저것 사먹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있다. 하교도 호인과 같이한다. 지무를 집에 데려다 주고 호인은 가버린다. 혼자 남은 지무는 때론 공부를, 때론 숙제를, 때론 식사를 한다. 강진이 구해준 집은 방 하나에 주방겸 거실, 욕실겸 화장실이 전부인 아담한 곳이었지만 따뜻하고 깨끗했다. 이곳을 안내해 준 호인은 이 집이 지무 명의로 되어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감흥은 없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생활하는 동안 지무는 자기 혼자 제자리라고 생각했다. 지무 자신은 그날에 묶여 있는데 남들은 그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강진은 어떨까? 그 뒤로 강진을 보지 못했다. 그때 강유 너머로 보았던 등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다. 철저하게 거부되어진 몸이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지무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강유로 인해 방어막이 갈기갈기 찢겨져 철저하게 까발려진 지무의 욕망이었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유치한 욕망에 대한 거부감……. 솔직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존심. “하아…….” 호인은 강진과 지무 사이에서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 지 평소와 똑같이 지무를 대했다. 지무의 짐을 직접 싸서 지무를 쫓아낸 강유는 그날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또다시 헤집어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찾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벽에 걸려져 있는 달력을 보았다. 11월 16일. ……내일은 강진의 생일이다. “선물…… 주면 받을까?” 선물을 주고 사과를 하면…….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그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지무는 서지무라는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쿡쿡. 이 지경이 되서도 자기애 덩어리로군, 나란 녀석.” 지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서지무’라는 얼굴 모를 소년을 자신보다도 소중히 하는 강진이 이상한 것이다. 아니, 강진 역시 ‘서지무’를 동경하고 따르면서…… 어쩌면 사랑하면서 다른 무엇을 얻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무가 강진에게 안김으로써 ‘서지무’의 자리를 얻고 싶어 했던 것처럼. “…….” 일이 이렇게 됐어도 학교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강진이 주는 돈도 마다할 생각은 없다. 한번 죽자고 마음먹었던 것을 억지로 이 자리에 앉힌 것은 강진이다. 그러니 이것도 강진의 일방적인 고집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자. ‘서지무’만을 위하여 지무를 이용한 것을, 지무 역시 자신만을 위하여 강진을 이용한 것으로 상쇄시키자. 지무는 서랍에서 돈을 꺼냈다. “선물은 뭐가 좋을까?” 강진에게 어울릴 것을 사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아무래도 싸구려는 취급도 안 할 것 같은데, 비싼 것을 사줄 형편은 못됐다. 향수는 어떨까? 강진에게서는 늘 비누 냄새만 났지만 드레스 룸 한 쪽 진열장에 향수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쓸 때는 쓰는 모양이니까. 강진에게 어울릴만한 향수는 역시 좀 시원하고 심플한 향이……. 향수 코너를 찾아 걷다가 문득 눈에 띠는 것이 있어 멈춰 섰다. 차가운 느낌의 은제 목걸이. 은 특유의 우아한 광택을 지닌 원통형 펜던트의 목걸이였다. 지름은 1㎝도 안 될 것 같은데 유독 눈에 띠었다. “이거 얼마죠?” 생각보다 훨씬 비싼 가격. 알고 보니 명품이란다. 지무 자신이 사라고 하면 꿈도 못 꾸겠지만 강진에게는 저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을 것 같아 결국 무리해서 사버리고 말았다. 생일선물이기도 하지만 사과선물이기도 하니까 좀 비싸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납득시키면서 말이다. 고풍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나와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그 날 이후로 허기라고는 전혀 못 느꼈는데 갑자기 맹렬한 공복감이 밀려들었다. 그 갑작스런 현상이 지무가 그 날로부터 한 걸음 내딛은 증거라 생각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양 많고 빨리 나올 법한 음식을 시켜놓고 물을 몇 번이나 들이켰다. 음식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별 생각 없이 구경했다. 식당이 2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형색이 되었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보여 한층 무료하게 턱을 괴는데, 굉장히 눈에 띠는 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특히 그 맨 앞에 선 백발 소년……. 눈에 익다. 기억을 더듬어 보던 지무는 곧 그 소년이 누군지 생각해냈다. 강진을 처음 만났던 나이트에서 강진에게 무참히 밟혔던 그 소년이다. 아직 거동이 불편한지 가끔가다 가슴 쪽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썼다. 그럴 때면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보며 뭐라고 떠들어댔다. 투정이라도 부리는 걸까? 하지만 투정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쓰기에는 분위기가 험악한데……. 백발소년의 옆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 이외에는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성진고교 교복이다. 저 남자는 학생이 아닌 걸까? 위에서 내려보는 각도라 키가 얼마나 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발소년보다는 훨씬 컸다. 체격도 좋았다. 검은색 폴라티에 검은색 청바지, 그 위로 갈색 가죽 재질의 하프더블코트를 걸쳤다. 네크라인이 털로 되어 있고 허리라인벨트가 있는 코트였다. 진갈색 가죽 베레모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생김을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의 남자였는데, 백발소년이 인상을 써도 무척 태연자약해 보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발소년이 멈춰 서서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백발소년과 같은 교복군단 녀석들이 익숙하게 남자를 둘러쌌다. ‘흠. 설마 이 대로에서 집단 구타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는지 백발소년이 손짓하여 교복군단을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남자를 쏘아보며 뭐라고 말했다. 전보다는 진정된 분위기였다. 남자는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는 그대로 무리를 벗어나 혼자 걸어 가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태연해 보이기만 하는 남자였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아, 예.” 저들을 구경하느라 잠시 잊었던 허기가 급격히 밀려들어 관심을 끊고 식사에 집중했다. 먹고 바로 강진에게 가볼 참이었다. 차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겠고 그 앞에서 강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줘야겠다. 2, 3학년은 자율학습을 하니까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도 기분이 안 풀릴지도 몰라. 더 나빠질지도 모르고.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당일 주는 건 피해야지……. 공연히 생일날 기분 잡치게 만드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 나름대로 계산하며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지무는 자신의 아둔한 머리를 탓했다. 왜 이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병신 새끼. 무슨 낯짝으로…….” 인상을 쓴 채 자신을 노려보는 강유를 보며 지무는 한숨을 삼켰다. 한 손에는 고급스런 명품 로고가 찍혀진 쇼핑백을, 다른 한 손에는 반찬거리를 들고 서 있는 그녀에게서 노골적인 적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지무는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뭐라 해도 이곳에서 계속 강진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강유는 뜻밖에도 지무가 앉아 있는 벤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층 안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나 보자. 무슨 용건이냐?” “생일이라고 해서…….” “선물 갖다 바치게? 선물 주면서 사과라도 할 셈인 거냐?” “예.” 강유는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짐 좀 덜겠다?” “예.” 지무는 산뜻하게 인정했다.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열등감에 절어 있는, 특별함을 갈구하다 못해 남의 특별함을 뺏으려했던 저질. 그게 지무다. 더 이상 그것을 위선과 자기 합리화라는 예쁜 포장지로 꼼꼼하게 싸서, 마음에도 없는 애정이라는 리본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다. “미친 새끼.” 지무의 솔직함이 그나마 마음에 든 것인지 강유의 욕설에 전과 같은 혐오는 없었다. 경멸은 여전히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지무님이 왜 윤명고교라는 작은 놀이터의 꼬마대장이 됐는지 아냐?” “3학년과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마찰이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강유는 짐을 옆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무에게는 권하지 않고 다시 주머니에 넣고 불을 붙였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담배 피십니까?” “왜? 꼽냐?” “아니요. 집에서 피우시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아서…….” “집에선 안 펴. 가끔 밖에서나 피우지. 이 놈도 언제 산건지 기억도 안나.” 집에 냄새가 배는 것이 싫은가 보군, 멋대로 납득하는 데 강유가 사정을 이유를 말해주었다. “지무님이 담배냄새를 안 좋아하시거든. 그래서 강진은 아예 입도 안 대지.” “…….” 강유는 문득 웃으며 지무를 봤다. “너, 말투가 변했다?” “예?” “전에는 딱딱 끊어서,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잖아. 매사 침착한 척 하려고 애써 무표정한 척 하려고 하고. 더럽게 안 어울렸어.” “…….” ‘서지무’를 흉내 내고 싶었던 거다. 지무자신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이미 주위에서는 다 알고 있었다. 강유도, 김윤호도, 유호인도. 아마 강진도 알 테지……. 더럽게 쪽팔린다. 지무의 동요에는 관심이 없는 강유는 깊이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강진은 동네 꼬마 놀이에 관심 없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조용히 생활했어. 하지만 그 놈 꽤 눈에 띄는 타입이잖아? 위압감도 있고 박력도 있고. 붙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놈이 눈에 뻔히 보이는 데 그걸 내버려 둘 놈이 어디 있냐. 학교를 장악한다는 유치한 호승심에 휩싸여 있는 놈이면 특히나. 그 마당에 강진 성격이 조용히 살겠다고 자존심을 꺾고 둥글게 살 성격도 못 돼. 결국 본인만 관심 없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거지.” 다시 깊이 빨아들인다. 담뱃재가 붉게 달아올랐다 가라앉았다. 회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지만, 오는 시비는 막지 않는다. 강진은 그런 놈이야. 그러다보니 이번엔 2학년 놈이 오고, 그 놈을 무찌르니 이번에는 더 높은 서열 놈이 오고. 계속 그 반복이다 보니 점점 귀찮아졌지. 그래서 작정하고 학교를 먹어버린 거다. 조용히 살려고 말이야. 근데 이번에는 타교에서 시비를 걸어와.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이번엔 시행착오 없이 바로 일대를 장악했다. 그게 다야. 강진이 학교 짱이 된 이유는. 애당초 관심 없는 자리였고, 당연히 그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무님이 쉽게 자기에게 달라고 할 수 있었던 거겠지.” “……!?” ‘서지무’가 달라고 했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강진이 자신의 피와 노력을 들여 오른 자리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달라고……. 지무의 얼굴이 경멸과 분노로 일그러지는 걸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던 강유가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지무님 역시 꼬마 놀이엔 관심 없어. 네 놈들에게는 그 자리가 가치 있는 자리인지는 몰라도 지무님에게는 무의미한 자리다.” “그럼 왜……?” 강유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집어서 밑으로 내리고 상체를 숙였다. “강진을 지키기 위해서.” “예?” “그때 3학년들을 만났던 건 우연이 아니야. 조용한 옥상을 선호하는 강진을 노리고 일부러 매복하고 있었던 거였다. 옆에 지무님이 안계셨다면 강진도 어떻게 됐을지 몰라. 대뜸 칼부터 찌르고 들어왔으니까. 그것도 3학년 일진 거의 전부가.” “……!” “2학년일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3학년으로 올라가보니 더더욱 윗자리가 탐났던 모양이야. 타교의 동급생들은 3학년이 되면서 세대교체 되어,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군림하는데 지들은 어린 놈 밑에서 졸업할 때까지 굽실대야 하니까. 꼴에 존심이 상했던 거겠지.” “그거랑 강진 선배를 지키는 것과 무슨…….” “삼학년의 절대다수가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어린 것들이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지. 강진은 혼자였고, 무기도 없었다. 기습을 당한 거라 위치도 불리했지. 그런 상황에서 강진이 어떻게 무사히,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 하냐?” 지무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강유를 보았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설마…….” 그러나 강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떡이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지무님 덕이야. 그때 무리한 탓에 상처가 도져서 다시 요양을 해야 했지.” “……!” “뭘 모르는 병신들은 지무님이 강진의 보호 하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반대야. 지무님은 강진을 보호한 채 그곳에서 벗어났고, 자신에게 짱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어. 그 자리에 있으면 노림을 당해. 그걸 뻔히 아는 데 순순히 넘길 리 없잖아? 당연히 강진은 거부했지.” 대신 총대를 멨다. 그 ‘서지무’가 강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완벽하고도 특별한 맹수를 위해서……. 그런!? 귀로는 들리지만 머리에는 꽂히지 않는 말들이 쫘르륵 나열되었고, 지무는 혼란해 했다. 강유는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지무님은 나에게 주는 것이 아까운 거냐고 윽박질렀어. 지무님이 그렇게까지 나오면 강진으로서는 속수무책이지.” 거기까지 말한 강유는 킥킥 웃었다. “그때 사건을 저질렀던 놈들은 모두 학교 측에 알려져 버렸고, 학교 측에서 명문고의 위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강제전학을 시켰다. 놈들의 극단적인 행동에 열받아버린 3학년 동기의 고발 덕에 가능했지. 하급생이 고발하면 3학년이 나서서 응징하기 때문에 1, 2학년으로서는 불가능했는데 마침 생각이 제대로 박힌 놈이 하나 있어준 덕에 일이 쉽게 풀렸어. 그 놈 이름이 김윤호던가?” 지무는 멍하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서 지무를 건드렸던 패거리 중에서 윤호만 무사했던 거군. 지무는 건드렸지만 ‘서지무’는 옹호했으니까. 과거의 공적과 서로 상쇄된 거로군. “어쨌건 열혈바보들은 대폭 물갈이됐지만 위험분자는 남아있으니까 강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막을 쳤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난 돌이 되어버린 지무님이 필연적으로 맞게 될 정을 최소로 하기 위해서 말이지.” 지무는 어눌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도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버렸잖아요?” “버려?” 강유는 차게 웃었다. “지무님이 강진을 버리는 일은 없어. 절대로.” “…….” 다른 의견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견고한 신뢰. 지무는 숨이 막혀와 깊이 심호흡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버리고 갔잖아요! 노려지는 강진 선배를 보호하기 위해 짱 자리에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더 이상 보호하기 싫다는 뜻 아닙니까?” 강유는 여느 때보다도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토해냈다. “강진은 이제 곧 3학년이 된다. 더 이상 어린놈이 윗자리에 있어 아니꼽다는 놈은 사라지게 된다는 거지. 그 때문에 지무님은 적당한 타이밍이라 생각하고 선뜻 가버리신 거다. 만약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강진이 2학년 초에 있었다면 그렇게 가진 않으셨을 거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계산하셨겠지. 강진이 3학년이 된 뒤에야 물러나면, 그때는 지무님을 방패막이로 삼은 거라는 악성루머가 돌 게 뻔하니까. 뭐, 강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지무님은 강진이 비웃음 당하는 거 용납 못하시니까. 강진의 목숨다음으로 강진의 긍지를 아끼시니까.” 지무는 한참 만에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물었다. “……같은 상황이라니요?” 단순히 강진에게 짱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서 사라진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강유는 분명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라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강진의 곁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달리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때 다쳤다는 건? 이미 다쳐 있었다고 하던데…….” “둘 다 비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 동생, 강진에 대한 것뿐이야.지무님의 일은 해당사항 없음.” 강유는 아직 장초인 담배를 옆에 놓인 쓰레기통 측면에 눌러서 불씨를 끄고 안에다 버렸다. 그리고 짐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선 채로 지무를 내려보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지무님이 되겠다고 발악해도 될 수 없어. 넌 강진을 동경하고 있을 뿐이니까. 강진의 강함과 미모와 부와 능력을.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으니, 그렇게 된 특별한 존재를 손에 넣자고 생각한 것뿐이야. 그 특별한 존재에게 이미 ‘주인’이 있자, 그럼 내가 그 부재중인 주인의 대신이 되어보자고 계산한 거고. 넌 비열해. 그리고 못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 스스로 노력하도록 해. 남이 만들어준 특별함은 조롱의 대상일 뿐이야. 네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지무님을 가볍게 생각했던 것처럼.” “……노력만 가지고 되는 거였으면 진작 됐습니다.” 그 열등의식으로 가득한 반박은 강유가 앞서 한 말을 전부 긍정한다는 뜻이었다. 강유는 낮게 웃었다. “2주 하고 전교 8등이다. 그게 작은 전적인 줄 아냐? 9등한 놈에게 가서 물어봐. 얼마나 공부했냐고.” 그리고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지무가 어쩌면 가졌을 지도 모르는 실낱같은 미련과 희망을 가차 없이, 남김없이 잘라내고는. ‘지키기 위해…….’ 지무는 지킴을 받고 싶었다. 보호 받고 싶었다. 강진이 자신을 외로움에서 구해주길 바랐다. 지무 자신이 강진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완벽한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그에게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감히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납득시키면서. ‘9등한테 물어보라고……?’ 강유의 말을 되새겨보며 지무는 쿡쿡 웃었다. 비참했다. 정액으로 더럽혀진 침대에서 강진의 구토소리를 들었을 때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비참해졌다. 뚜벅뚜벅. 망설임 없는 당당한 구둣발소리에, 웃느라 움츠린 상체를 들었다. 역시나 강진이었다. 지무를 보지 못했는지, 곧장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니, 보고도 무시한 거겠지. ‘서지무’가 아니니까. “강진 선배.” 나직이 부르자 고개만 돌려서 지무를 본다. 지무를 무시했지만, 그렇다고 피할 생각인 건 아닌 듯했다. 지무가 그에게 있어 그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거겠지. 그 날의 섹스도, 아니 강간도 그 정도밖에 안되는 걸까? 다소 악의적인 생각을 해보던 지무는 그것을 한숨으로 내보내고 대신 강진에게 걸어갔다. “저…….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 “나한테 할 말 있나?”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 똑같은 어조로, 똑같이 무심하게 묻는 그를 보며 지무는 흐릿한 실망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생일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요. 내일이 생일이라고 호인에게 들어서…….” “…….” 강진은 냉랭한 얼굴로 지무를 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 가차 없는 행동에 지무는 순간 당황해서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탁! 붙들기가 무섭게 뿌리쳐진 손이 욱신거렸다. 놀란 눈으로 강진을 보자, 더없이 매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선물을 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필요 없다.” “선물을 필요해서 받나요?” 억지로 웃어보았지만 강진의 냉기는 가셔지지 않았다. 지무는 웃기를 포기하고 맥없이 물었다. “더럽습니까, 제가?” “…….” “더럽고 혐오스럽나요?” “아니.” 답하지 않을 것 같았던 강진의 뜻밖의 부정을 해왔다.차가우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지무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무 형님에 대한 욕정을 내보인 나 자신에게 실망했을 뿐이다. 상대가 지무 형님 본인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 너에게 죄책감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아. 저항하지 않았을 테지. 기억은 못하지만, 지무 형님이 싫다는 걸 내가 할 리 없으니까.” 확실히 그랬다. 거부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그 미약한 몸짓에도 얼른 떨어져 나갔던 그였으니까. “네가 뭘 원해서 나를 받아들인 건지 관심 없다. 뭘 바라고 나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건지도 관심 없다.” “사과를 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필사적으로 진심을 호소했지만 강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매서운 냉기를 뿜어내면서 돌아섰을 뿐이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며 지무는 작게 속삭였다. “정말로 그뿐이라고요…….” 슬프지 않았다. 상처받지 않았다. 지무는 그런 자신이 끔찍했다. 철저한 자기애. 강진을 사랑하지 않았다. 조금도. 그가 무심하게 대해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몸을 섞은 지무가 아닌 간접적으로 욕정을 품은 ‘서지무’에게 죄책감을 느낌에도 비참함이 없었다. 강진이 지무를 대하는 모습엔 감흥 없으면서, 자신이 강진에게 대할 당시 스스로의 긍지를 꺾었던 것에 대한 비참함은 넘쳐난다.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프지도 않다. 그래서 아프다. “젠장. 나란 녀석이 이렇지, 뭐.” 사랑 같은 건 모른다. 지무가 사랑한 건 자기 자신뿐이다. 부모님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부모님과 함께 산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강진도 사랑하지 않았다.그가 강진과 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르지만 고독은 안다.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빌어먹을……. 역시 부럽다. 강진 선배. 그리고 이름만 같은 ‘서지무’.” 부럽다! 이제 두 번 다시 ‘나도 서지무다.’라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호인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교문이 보일 무렵이었다. 항상 느긋했던 그가 경계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언제라도 일전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투기를 흘렸다. 마치 습격 예고라도 받은 듯한 모습이라, 지무는 장난스레 물었다. “선전포고라도 받았냐?” “뭐?” “강유 누님 말이야. 사귀지 않아도 기습받았다며? 이젠 사귀기로 했으니까 언제 칼 맞을지 모르겠다?” 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바람을 삼키며 말했다. “그때야 안 사귀었으니까 내버려 둔 거고, 이제 사귀니까 제대로 상대해줬지.” “제대로 어떻게?” “…….” 호인은 느슨한 듯 하면서도 빈틈없는 미소를 씩 지어보였다. 그거로도 충분히 답이 됐기에 지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호인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말했다. “뭐, 예전만큼 많지는 않았어. 유이 누나가 ‘이 놈 키워 먹기로 했다. 설마 내 양육을 방해하진 않겠지?’라고 말하고 나서는 미친 놈 서넛 외에는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남은 서넛은 일차로 내가, 이차로 유이 누나가 차례로 손 봐줬지. 지금은 거의 정리됐어.” “……허허허…….” 최강 콤비 탄생! ……감탄을 넘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어? 잠깐! 유이 누나?” “응. 외자잖아. 몰랐냐?” “아니……. 하지만 나한테 통성명할 때는 유라고 부르면 죽인다고 했거든. 너도 여태까지 강유 누님이라고 하지 않았냐?” “아아.” 호인은 볼을 긁적이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강진 형님이나 유이 누나나, 옛날에 자기 반쪽한테만 이름을 허락하자고 약속했다더라. 부모님 그러시는 게 되게 보기 좋았다면서. 유이 누나 부모님들도 외자시거든.” “헤에…….” 부모님이란 단어에 가슴 한 쪽이 쓰라려왔다. 그것을 애써 꾹꾹 누르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까부터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냐?” “음…….” 호인은 고민하는 눈치더니 곧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떡였다. “생각해보니 너도 알고 있어야 될 일 같군.” 가볍게 한숨을 쉰 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애 선배가 어제 퇴원했다. 다른 놈들은 강진 형님이 직접적으로 나선 걸로 수그러들었는데, 지애 선배는 그것 때문에 더 맛이 간 모양이야.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걸고넘어질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오늘이 아닐까 싶어.” “왜?” “지애 선배가 맛이 간 건 지무 형님 일에만 반응을 보이는 강진 형님이 널 건드렸다는 이유로 나섰기 때문이다. 제 2의 지무 형님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게다가 넌 사내새끼. 그거에 더 열 받았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강진 형님의 생신이란 말이지. 지애 선배 생각에는, 강진 형님이 너와 오붓하게 둘이서 생일을 보낼 거라고…….” “그, 그게 뭐냐?”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호인은 희극적으로 양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짝사랑에 빠진 여심이란 게 그렇지, 뭐. 유이 누나 같이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흔할 줄 알았냐, 그럼?” “…….” 상당히 팔불출 같은 말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유 같은 사람이 흔하진 않지. “어쨌거나 오늘은 최대한 조심하고 있어. 조짐이 이상하다 싶으면 갈게. 조퇴하게 될 지도 몰라.” “응.” 그녀에게 죽도록 맞았던 것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비록 뼈에 금간 곳이 없었다지만, 기절하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지무에게 아픈 걸 즐기는 취미는 없었다. “조심하라고 말해도, 내가 뭘 어떻게 조심할 수 있겠냐.” “하긴……. 뭐, 끌고 가려고 하면 그때 그 놈이라도 시켜서 나한테 오게 해. 아니다. 그러면 그놈까지 끌려가겠군. 미리 아침에 말해둬. 이상한 놈들이 끌고 가면 곧장 5반의 유호인한테 알려달라고.” 지무는 답 대신 억지웃음이나마 애써 지어보였다. 민수는 크게 걱정하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어! 눈치 안채이게 날라 가서 알릴 테니까, 너도 시간 좀 끌고 그래.” “내가 끌고 싶어도 상대가 대화할 마음이 있어야 끌지. 오로지 필살(必殺)을 외치며 끌고 가는데 어떻게 시간을 끌 수 있겠냐?” “쯧쯧. 대리출석 하는 게 왜 그리 파란만장하냐?” “내 말이 그 말이다.” 기운 없이 책상에 엎드렸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물었다. “너 우리 학교 전교 9등이 누군지 아냐?” “응.” “그래. 알 턱이 없…… 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지무는 엎드렸던 상체를 벌떡 들고 민수를 보았다. 민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되물었다. “그건 왜 궁금한데? 궁금하려면 ‘서지무’의 수석자리 차지한 놈이 궁금해야 하는 거 아냐?” “누군데?” “수석? 아님 9등?” “9등!” 머리를 긁던 손으로 이번에는 볼을 긁적이며 민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민수의 입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지무가 버럭 성질을 냈다.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러나 민수는 여전히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기 너머로 가 있는 것을 본 지무는 순간 경직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반도 어느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오, 온 건가? 제길!’ 차마 돌아보지 못하는 데, 뒤쪽에서 손이 뻗어져 지무의 명찰의 각도를 위로 꺾었다. “서지무……?” 지무의 머리카락이 숨결에 흔들렸다. 옆의 의자를 짚고 있는 손아귀가 크고 거칠었다.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강진의 것만큼이나 낮지만 부드럽고 차분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단 상대가 지애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지무는 고개까지 끄떡이며 대답했다. “그, 그런데요……?” 그러자 상대의 손이 거둬졌다. 지무는 후우 숨을 토하며 상대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상대편이 한 발 앞서 지무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 버려 얼굴은 보지 못했다. 사복 차림의 남자였다. 진갈색 가죽 베레모와 갈색 하프더블코트, 검은색 청바지, 발목을 살짝 올라오는 런닝슈즈가 보였다. 키는 강진과 비슷한 장신이다. 아니, 저쪽이 조금 더 클까? 체격도 상당해 보였다. 두툼하다기보다는 날렵하다는 인상이었지만 무척 단단해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 교실에 쳐들어왔는데도 다들 침묵을 지키며 뭐라 말 한마디 못했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당당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비웃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지무 자신도 그들과 똑같이 주눅 들고 있었으니까. 교탁까지 걸어간 남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교탁과 칠판 사이에 섰다.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상의는 회색 V넥티였는데, 남자의 다부진 근육이 그대로 보였다. 담임이 또 깜박하고 간 출석부를 한번 내려본 남자는 고개를 들어 정확히 지무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지무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찰나의 마주침. 남자는 곧장 고개를 숙여 출석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펼쳤다. 뭔가를 찾는 지 고개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졌다. 곧 찾았는지 움직임이 멈췄다. 한 손으로 출석부를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 출석부 안의 어딘가를 짚었다. 그리고 가로로 길게 움직였다.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가로로 쭉.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가로로 쭉. 그러길 몇 번 반복하던 남자는 입술을 비틀기 시작했다. “쿡쿡.” 낮게 웃는 그를 보며 다들 쭈뼛해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때 뒷문이 열렸다. 긴장이 고조되던 분위기를 흔든 그 소리에 다들 반가워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본의 아니게 시선 집중을 받아 당황할 법도 한데, 이 방문객은 무사태평한 얼굴로 지무 쪽을 보았다. 호인이었다. 지무는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쁨에 웃으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까딱여 보였다. 곧장 지무를 보느라 저 앞의 이질적인 존재를 미처 보지 못한 호인은 지무의 부름에 응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차피 그에게 볼 일이 있어 왔던 거니까. 그러나……. “호인아.” “……!” 부드러운 듯 차분한 부름. 호인이 그토록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눈이 튀어날 정도로 크게 뜨고 입까지 약간 벌렸다. 그리곤 경직된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교탁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 “……!”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확인한 호인은 몇 번이나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는 그런 호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소로는 느껴지지 않는 따스한 호의가 있는 웃음이었다. 그것에 긴장이 풀렸는지 호인의 몸이 급격히 이완되며, 딱딱해진 혓바닥도 제 역할을 했다 “지무 형님……!” “……!?” 지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인을 바라보았다. 호인은 남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가 말했다. “가서 불러와라.” “예? 예!” 정확한 지칭이 없기에 반사적으로 물었던 호인은 곧 답을 깨닫고 황급히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거친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호인이 사라진 뒷문을 멍하니 보다가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출석부를 보고 있었다. “저, 저기…….”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지무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그걸로 오늘 분의 용기는 다 써버린 것 같이 도저히 다시 입을 열 수 없었다. 다행히 그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어 뻣뻣이 서 있는 지무를 보았다. 그리곤 더더욱 다행하게도, 왜 불렀냐고 묻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서지무.” “예?!” 움찔해서 답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진짜 저 남자가 ‘서지무’라면……. ‘젠장. 내 이름도 서지무다! 부모님이 지어준 내 이름이라고.’ 입술을 깨무는 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목소리가 미처 나오기도 전에 앞문이 쾅 열렸다. 그러면서 덩치들이 다섯이나 뛰어 들어왔다. 이미 호인으로 인해 활짝 열려진 뒷문에도 열명의 덩치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는 지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지애 선배……!” 지무는 겁에 질려서 거의 본능적으로 교탁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봤다. 덩치들이 사복차림의 남자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덩치 둘이 그를 에워쌌고 다른 셋은 문을 사수했다. 지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진을 포지션을 정해둔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몸은 멀쩡해 보이네? 다행이도.” 지애의 시선은 오직 지무에게만 꽂혀져 있었다. 그러나 지무에게 별 원한이 없는 덩치들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복차림의 남자를 힐끔힐끔 살폈다. 남자는 지극히 여유롭게 출석부를 덮고, 세로로 세워서 그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곤 느긋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했다. 지무는 매달릴 만한 곳이 그밖에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인 얼굴로 그만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아랑곳 않고 앞만 보는 지무의 모습에 지애는 인상을 썼다. 응원군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지무의 시선을 쫓아갔다. “너!” 그 부름에 남자의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돌아갔다. 지애는 빠드득 이를 갈며,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살기를 뿜어냈다. “서지무! 이 개새끼!” 그리곤 달려들었다. 반 아이들은 황급히 벽과 창 쪽으로 붙었기에 그녀가 달려가는 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중간에 의자까지 집어 들고 빠르게 내리꽂았다. 남자의 양 옆에 있던 덩치들이 눈치 빠르게 남자의 몸을 붙잡았다. 남자는 그 순간까지도 고요한 듯 차분했다. 깊고 깊은 심해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위험……!” 지무는 비명처럼 경고성을 내뱉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바로 깨달았다. 남자가 세게 걷어찬 교탁이 지애와 거세게 부딪쳐 같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남자는 이어서 한쪽 발을 축으로 몸을 돌려 왼쪽에 있는 덩치의 얼굴을 걷어찼다. 오른쪽에 있던 덩치는 그 반동에 휩쓸려 얻어맞지도 않았는데 날아가 책상들 속에 박혀버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눈 두어 번 깜박할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을 벌인 남자는 교탁을 밀쳐내려는 지애에게로 다가가, 교탁을 지그시 밟았다. 그 밑에 깔린 상태로 교탁의 무게와 남자의 무게를 전부 짊어져야 했던 지애는 신음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교탁이나 남자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문과 뒷문에 포진해 있던 덩치들이 뒤늦게 달려들려 했지만 남자는 지애를 압박하고 있는 발에 힘을 더 줌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했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압박감에 지애가 비명을 내질러 버린 것이다. 다가오면 지애부터 손보겠다는 명백한 협박에 덩치들은 주춤주춤 물러나야했다. 발에 힘을 준다는 간단한 행위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덩치들을 물리친 남자는 상체를 숙여 지애를 가까이에서 내려보았다. “그때 그 여자군. 우리 집 앞에서 봤지.” “거지새끼! 강진한테 얹어 사는 주제에 우리 집은 무슨 우리 집이냐!? 개새끼!” 지애는 그 상황에서도 용케 악을 썼다. 남자는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을 풍겨냈다. 그것을 지켜보던 지무는 저 남자라면 사람을 찔러 죽이면서도 저렇게 차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온 줄은 지금에야 안 것 같고……. 나도 없는 이 곳엔 왜 와서 행패지?” “네 놈 말고도 죽일 새끼 있어서 왔다!” 교탁에 깔려 있는 비참한 자세이면서도 지애의 독기는 악랄하여 지무는 마른침을 삼켰다. 벽과 창에 달라붙어 있는 반 녀석들도 질린 얼굴로 지애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 “강진에게 엉덩이 흔드는 남창새끼가 또 생겼으니까!” 지무는 펄쩍 뛰며 결국 끼어들었다. “누가 엉덩이를 흔듭니까! 전 단순한 대리출석자라고요!” “개새끼! 발뺌하면 단 줄 알아!?” 지무에게 버럭 소리는 질렀지만, 악의는 전부 눈앞의 남자에게 쏟아 부었다. “병신 새끼! 주제를 알고 떠났으면 계속 떠나 있을 것이지 왜 돌아 온 거야!? 왜? 여행자금이 부족하든? 강진한테 다시 손 벌리러 왔냐? 비렁뱅이! 남창새끼! 근데 어쩌냐? 네 놈 말고도 속궁합 잘 맞는 새끼가 생겨서, 네 놈은 이제 나앉게 생겼는데?” 그리곤 깔깔대는 지애에게, 남자는 지무나 호인을 대했을 때와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강진에게 반했나?” “……!” 조롱기 없이 차분한 어조로 새삼스러운 것을 물어오자 지애는 순간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놈이 말한 것에 긍정하는 것은 지는 것 같고, 부정하는 것은 강진에 대한 배신 같고……. 자존심과 애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애를 가만히 내려보던 남자는 좀 전과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자기 마음에 확신조차 없는 거로군.” “씹! 누가!?” 지애는 발끈했지만 이미 그녀의 기세는 꺾여 있었다. 지무는 멍하니 남자를 보았다. 저게 ‘서지무’인가? 정말로 ‘서지무’인가? 강진에게서 철저히 보호받는 모범생, ‘서지무’인가? 강유의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니지만, 와 닿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강진이 보호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강진과의 행위에서 남자임에도 안기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서지무’라면 안기겠지. ‘서지무’라면……. 강유의 말을 다 듣고 나서도 그 이미지는 깨지지 않았다. 강진과 맞먹을 정도의 장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진과 맞먹을 정도의 단단한 근육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건 전혀……. “지무 형님……!” 상체를 숙인 채 지애를 내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뒷문 쪽을 보았다. 달려왔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강진이 문틀을 붙잡고 서있었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만은 흔들림 없이 남자만을 보고 있었다. 그런 강진을 보고나서야 지무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서지무’구나. 강진의 ‘서지무’구나.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됐다. 하하…….’ 모든 게 계산 밖이다. 차분한 척 흉내 냈던 것만은 정답이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강진은 천천히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강진을 바라보던 남자, 서지무는 상체를 들고 발을 떼었다. 그 틈에 지애는 교탁을 밀치고 빠져나왔지만 강진의 앞에서 서지무를 욕하고 구타하는 꼴은 보일 수 없어 이만 갈았다. 강진이 물었다. 희미하지만 떨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무는 알 수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해서 ‘서지무’를 그리던 목소리와 똑같았으니까. “언제 한국에 들어오신 겁니까?” “어제 밤 비행기로 왔다.” “그럼 왜 어제 집으로 안 오신 겁니까?” “가는 길에 성진고 얘들을 만났다.” 지무는 퍼뜩 어제의 일을 생각해냈다. 어째서 못 알아 본 걸까? 어제 백발 소년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 남자가 아닌가! 한편, 한국이니, 비행기니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맞춰보던 지애가 강진에게 고함을 지르듯 물었다. “강진! 너 이 새끼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강진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지애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우물우물 정정했다. “짜, 짱이…….” 그 걸로도 강진의 냉기는 가라앉지 않았지만, 서지무가 입을 열자 더 이상 지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자신의 신경과 관심, 주의 등등 모든 것을 서지무에게만 집중했다. 그것을 본 지애는 차라리 자기에게 화를 내달라고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구나.” “…….” 강진은 침묵했지만, 여전히 서지무를 바라보는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서지무는 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더 이상 학교에 있을 의미가 없어졌다. 자퇴를 할 거다. 윤명고는 다시 네가 맡아서 이끌면 되겠지. 서류 문제는 알아서 해주겠니?’” 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선글라스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잡고 느긋하게 벗었다. 냉정하고 매서운 눈동자와 인상을 가진 강진과는 대조적인 서글서글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인상을 가진 소년이었다. 강진과 마찬가지로 ‘남자’라 불리는 쪽이 더 어울릴 법한. 강진은 검집에서 벗어나 금방이라도 적을 벨 것 같은 검의 이미지라면, 서지무는 검집에 꽂혀져서 그 진면목이 안 보이는 검의 이미지였다. 안에서 어떤 날이 번뜩이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더 위험하고, 또 안정된 느낌. 강진보다도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의 남자……. 지무와 이름만 같은 남자……. 서지무는 본래의 말투로 돌아가 짧게 덧붙였다. “그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곤 한쪽 손에 계속 들고 있었던 출석부를 쓱 올려 보이고 가볍게 흔들었다. 강진은 계속 침묵했다. 서지무는 그런 강진을 보며 한숨을 한번 쉬고 출석부를 옆에 있는 책상위에 던졌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강진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뒷문으로 향했다. 강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금방이라도 부식되어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한 모습에 지무는 울컥했다.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않고 갔다고 조롱받았던 강진. 실제로는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된 상태였다. 좀 더 사실에 근접해서 말하면, 자신의 자리를 돌려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런 조롱을 견디었던 것은 서지무가 있을 장소, 있었던 장소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몰라주는가? 그것마저도 몰라주는가!? 울컥한 지무가 고함을 지르기 전에, 서지무가 먼저 강진에게 말했다. “눈이 많구나. 올라가서 얘기하자.” “……!” 썩어가던 몸이 소생한 듯이 강진의 몸에 온기가 돌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전해져 왔다. 차마 쫓아갈 생각을 못하고 우뚝 서 있는 지애와 덩치들을 한차례 본 호인은 어깨를 으쓱이곤 가버렸다. 서지무가 돌아왔으니 지애가 지금 당장 지무를 칠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애와 마찬가지로 우뚝 서 있기만 했던 지무는 어느 순간 교실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좌우로 살폈지만 강진과 서지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올라가서……. 옥상!’ 예전에 매점에서 만났던 2학년 선배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항상 옥상에 있었다고. 계단 쪽으로 달려가, 두 단씩 세단씩 밟고 올라가, 옥상문을 눈앞에 뒀을 때……. 지무는 자신이 저들 안에 끼어들 자격이 없음을 떠올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서지무를 만난 강진이 방해를 용납할 리도 없었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자리를 옮긴 서지무가 굳이 쫓아온 탐색꾼을 내버려둘 리도 없었다. 그래도 반 정도 열려 있는 옥상문 앞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는지 둘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한국에는 어쩐 일로 돌아오신 겁니까?” “오지 않길 바랐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해서…….” 서지무가 웃는 소리가 한층 흐리게 들렸다. “오늘이 네 생일이잖니.” 잠깐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자, 선물.” “……감사합니다.” 강진이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날 밤의 떨림을 고스란히 간직한 목소리……. 지금도 눈앞의 남자에게 욕정을 품고 있을까? 그때처럼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서지무가 깊게 심호흡하면서 말했다. “곧 3학년이야. 슬슬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한다. 나에겐 더 이상 학교에 있을 의미가 없다. 대리출석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런 게 필요했다면 내가 조치를 취하고 갔을 거다.” “…….” 그러니 더 이상 이런 짓 하지 말라는 우회적인 명령임을 지무마저도 알 수 있었건만 강진은 답하지 않았다.싫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지만, 알았다고도 답할 수 없는 심정을 침묵으로 대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네가 하기 싫다면 내가 마무리하고 가마.” “……!” 서지무의 차분하지만, 냉정하게 느껴지는 그 말에 지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강진이 느끼고 있을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무는 강진이 서지무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일부를 몸으로 느꼈으니까. “진아.” 토라진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우면서 다정한 목소리. 지무는 눈을 번쩍 떴다.지금……! “제가 그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겁니까?” 무뚝뚝하고도 사무적인 어조. 그러나 강진으로서는 최대한의 애걸이었을 것이다. “진아…….” 지무는 주먹을 꾹 쥐었다.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지금 분명 ‘진아’라고 했다. -옛날에 자기 반쪽한테만 이름을 허락하자고 약속했다더라. ‘반쪽…….’ 서지무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입에 담는 저 호칭이 가지는 의미를. “날 동경하는 건 알지만, 너도 충분히 강해. 멋지고 든든한 남자다. 내가 곁에 없어도 얼마든지 잘 해나갈 수 있고, 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 이제 3학년이 되니까 더 이상의 습격도 없을 테지. 너도 알지 않니? 난…….” -쾅! 서지무와 강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갑자기 열려진 문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조금 커졌다는 것 외에는 평상시와 똑같은 포커페이스 콤비를 보면서 지무는 이를 갈았다. “당신 따위, 강진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진짜 마음 같은 거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알고 있는 것 마냥 지껄여 대지마!” 지무는 악을 썼다. 뭐가 단순한 동경이란 말이냐! 뭐가 단순한 위안이란 말이냐! 동경의 대상을 그토록 안타깝게 그립게 서럽게 애절하게 부른단 말인가.한결같은 마음으로 오직, 오직 서지무만을 바라보는 데……. 정작 당사자는 그 마음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단다. 그 서글픔은 차라리 안도감에 가까울 런지도 모른다. 강진에게 있어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 관계가 가장 마음 놓이고 안심될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비참하다. 누가 비참하냐면, 지무 자신이 비참하다. 지무는 강진과 섹스를 했다. 서지무의 대용품으로서, 스스로의 긍지를 버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서지무는 아무 것도 모르고 강진은 그것에 만족한다면, 대용품으로나마 서지무로서 강진에게 안긴 지무는 뭐란 말인가? 그런 건 비참하다! 그 누구보다도, 지무보다도, 강진이 비참하다. 타인의 조롱도 비난도 반발도 오직 서지무라는 존재를 묶어둘 구실을 찾기 위해 감내했다. 그런 주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서지무의 결단에 밀려난다면 여태껏 자신의 한 짓들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결국 버려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이건 아니다. 멋대로 끼어들어서 함부로 참견한다고 욕먹어도 할 말은 없지만, 지무 역시 이들의 관계에 얽혀졌다. 죽으려는 그를 서지무를 위해 강진이 붙잡았다. 그리곤 서지무를 향한 강진의 애틋함에 기대버리고 말았다. 종국에는 서지무를 향한 강진의 순애보를 차지하고자 서지무로써 강진에게 안겼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얽혔다고 봐줄 수 있지 않은가. “강진은 당신을 좋아해! 빌어먹을 동경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보며 욕정한단 말이야!” “…….” 서지무는 그 차분한 눈매를 조금 크게 떴다. 그뿐이었다. 진의를 읽기 위해 지무의 눈동자를 계속 바라보던 그는 강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진아?” 지무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강진이 품고 있는 것이 동경인지, 사랑인지. 딱 집어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 부름에는 그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지무는 또 한번 끼어들었다. “당신! 당신이 지금 입에 담은 게 뭔지 알아? 그게 뭘 의미하는 지 알아? 자기 반쪽이란 뜻이래. 강진, 강유! 둘 다 자기 반쪽에게만 이름을 허락하기로 했대. 당신은 강진에게 나는 너의 반쪽이라고 속삭이는 것과 같단 말이야! ‘너의 반쪽인 나는 너를 버리고 가겠다.’ 그따위로 지껄인 거라고!” 자신이 소중하게, 혹은 괴롭게 숨겨왔던 비밀이 제 3자에 의해서, 자신에게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타인에 의해서 낱낱이 들쳐짐에도 강진은 서지무만을 보고 있었다. 그것에 지무는 공연히 가슴이 아파졌다. 지무는 사랑을 몰랐다. 때문에 강진도 서지무도 부러웠다. 하지만 강진 역시 행복한 사랑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한결같이 바라보면서, 상처입고, 혼자 힘으로 추스른 뒤 다시 바라보고……. 지무는 사랑은 모르지만 고독은 알기에 괴롭다. 강진은 고독은 모르지만 사랑을 알기에 괴롭다. 그런 강진이 이제 고독까지 알게 되어버렸다.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아! 그게 내……!’ 지무는 주먹을 꾹 쥐었다. “…….” 강진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지무를 통해 서지무와 섹스한 강진은 자신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체감했다. 섹스 당시의 일은 생각나지 않지만, 서지무에게 처음 키스했던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의 일……. 갈증은 깊어갔다. 눈앞에 서지무가 나타났을 때 느낀 죄책감과 설레임은 강진에게서 자제심을 앗아가고 있었다. 말을 할까?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그 최악의 선택을……. 반쪽이라도 좋으니까, 전부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그냥 지금 이대로 지낼까? 생일 선물을 받고, 종종 안부 전화를 주고받고, 가끔 찾아가기도 하고……. 말을 하지 말까? 강진은 갈등했지만, 그 갈등 자체가 답이 됐음을 얼마 안가 깨달았다. 서지무는 뭐라 표현할 길 없는 눈으로 강진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강진은 도망치고 싶어지는 자신을 간신히 억제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지무는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해봤자 소용없으리란 걸 알았기에 참았다. 서지무의 손이 강진의 뺨에 닿았다. 강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손이 서서히 강진의 뒤로 흘러가더니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빠르게, 강하게 뒤통수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 강진은 눈을 더 없이 크게 떴다. 지무도 마찬가지였다. 서지무가……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음. 그 따스함에 강진의 몸이 떨렸다. 입술도 떨렸다. 그 떨림의 틈새를 비집고 서지무가 들어갔다. 아스라한 흥분과 달콤함, 기묘한 슬픔과 벅참이 강진을 지배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강진에게서 떨어진 서지무가 한 첫말은 이랬다. “미안하다.” 그것에 강진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가 미처 답하기 전에 서지무는 그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겨 꼭 안았다. 강진의 귓가에 서지무의 숨결이 부딪쳤다. “난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해. 너도 알지? 겨우 찾았다. 내 동생……. 가여운 내 동생……. 이제 그 곁에 있어주고 싶다.” “…….” 강진은 창백한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서 그 말을 들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지무가 끼어드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서지무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네가 내 옆에 올래?” 강진의 뒤통수를 붙잡고 있는 손바닥은 전보다 강하게 힘을 주었지만 다른 손은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아직은 붙잡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꾹 쥔 채. “네가 내 옆으로 오면 난…….” 강진을 붙잡고 있던 손마저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 강진의 무표정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서지무는 그 차분한 느낌의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어냈다. “난 너를 사랑한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어.” 강진도, 지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직 서지무만이 달콤하게, 진지하게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기다릴 테니, 그러니 네가 와줄래?” 서지무는 답을 확신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하고 있지도 않았다.떨리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간절하게 강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명백히 드러난 눈동자를 마주보며 강진은 자신이 답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님을, 무서울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 강진은 입술을 힘들게 벌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간신히, 쥐어짜듯이 답했다. “가겠습니다.” 서지무는 환하게, 기쁘게 웃으며 두 손을 벌려 강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끌어안고 설레게 속삭였다. “사랑한다.” 강진은 울었다. 일그러지지 않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놀란 얼굴에 눈물이 고이지도 않고 흘러내렸다. 잠깐 상체를 떼었다가 그 눈물을 본 서지무는 소중하게 손을 갖다대어 그 눈물을 훔쳤다. 소중하게, 소중하게. 강진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서 오직 눈동자만이 기쁘게 슬프게 눈물을 토해냈다. 그 하염없는 낙루를 서지무는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둘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지무는 천천히 돌아섰다.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다행이다.’ 여전히 강진은 고독을 모른다. ‘다행이다.’ 사랑을 모르는데도 고독은 괴롭기 그지없다. 사랑을 안다면 더더욱 괴롭겠지. 지무는 옥상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면서 웃었다. ‘이게 제 속죄입니다, 강진 선배. 제 사과예요.’ 난장판이 된 교실은 벌써 정리되어 있었다. 지애나 덩치들도 가버렸는지 없었다. 지무가 들어서자 다시 침묵이 깔렸다.힐끔힐끔 보는 시선들이 거북했지만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민수가 대뜸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제길. 그게 아니라, 어떻게 됐어?” “뭐가?” 둘이 겨우 마음이 통해서 정말 소문처럼 연인이 되어버렸다고는 입이 삐뚤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민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다시 물었다. “너 말이야, 너!” “엥?” 생각지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수는 이번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물었다. “서지무가 왔으니까……. 저, 넌 대리출석이었잖아. 그러니까…….” “…….”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달은 지무는 씁쓸하게 웃었다. ‘난 이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건가?’ “너 이제 학교 안 오는 거야?” 지무는 애써 고개를 끄떡였다. “애당초 계약은 서지무가 돌아올 때까지였으니까.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잖아.” “씹…….” 작게 욕설을 내뱉던 민수는 갑자기 버럭 소리 질렀다. “안돼!” “엥?” “빌어먹을 새끼!” 갑자기 격분해서 지무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지무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껌벅였다. “이기고 내뺄 생각이냐? 엉?” “무슨 헛소리야?” “전교 9등!” “……?” “그 놈 원래 등수가 뭔지 아냐?” 알 턱이 없지 않냐고 반박하려는 지무는 민수의 기세에 밀려서 잠자코 고개만 저었다. “전교 8등이었다! 바로 네 자리!” 1등인 서지무가 나가고, 호인과 지무가 상위권에 들어왔으니 계산상 얼추 맞아떨어졌다. 지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답했다. “그런데?” “내 자리였다고!” “……!” 민수가 현재 전교 9등이었던가. 근데 그게 어쨌다고 저렇게 화를 내지? “2주 하고 전교 8등이라고? 웃기지마! 난 죽어라 공부했다! 중학생 때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피터지게 공부했어! 그걸 고작 2주 만에 따라잡고는 뭐? 가늘게 살고 싶어?” 그제야 지무는 민수가 화를 내는 이유를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열등감.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쉽게 해치우는 특별함. 선택받은 자. 완벽한 자. 하늘의 불공평함을 원망하고 열등감으로 찌든 자신을 굳은 자존심으로 감싼다. 그런 자신이 비참하고 화난다. 종내에는 상대를 원망하고 만다. 비뚤어가는 자신을 다스릴 수가 없다. 다스릴 수 없는 자신에게 또 다시 실망하고, 한층 깊고 찐득한 열등감을 품는다. 지무는 문득 웃고 싶어졌다.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려서 웃고 싶었다. 그런데도 눈에는 물기가 차올랐다. 우습지 않은가? 강진과 서지무를 향해 열등감을 품었던 지무를 또 다른 사람이 질투하고 있었다.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하찮은 지무를. 아무 것도 뛰어난 게 없는 지무를. 가련한 부모님도, 자기 자신조차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그 못난 지무를. 강진도, 서지무도 아닌 그 지무를. “미안해.” 힘겹게 속삭인 그 말에, 민수는 멱살을 붙잡은 손을 풀고 창 밖만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곤 낮게 중얼거렸다. “……제길!” 잠깐의 침묵 후 민수가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 두지 말라고. 너.” “……!?”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지무를 본 민수는 쑥스러운 얼굴로 억지로 뚱한 음성을 냈다. “내가 따라잡을 때까지 절대 그만 두지 마! 절대!” 지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배를 움켜잡고 한참을. 얼굴이 시벌개진 민수가 몇 번이고 등을 내리쳤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마 호인은 안 오겠지, 지무는 그리 생각하며 가방을 쌌다.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책들도 모두 꺼내서 가방에 넣었다. 아무리 원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이 경우가 그렇다. 서지무는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다시 떠날 것이다. 그러나 강진이 더 이상 서지무가 돌아올 장소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어졌다. 서지무가 강진 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강진이 서지무의 곁으로 가야 하니까. 그러니 더 이상 대리출석자는 필요가 없다. 대리출석자를 돌봐줘야 하는 호인의 역할도 이제 사라진 것이다. ‘고등학교 축제는 재미있다던데…….’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학교도 다니고 싶고, 드디어 친구가 된 민수와도 즐겁게 노닥거리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무가 가지고 있는 힘은 보잘 것 없었다. 강유의 도움이 없다면 전교 10등 안에 드는 건 무리다. 매번 수석을 하지 않는 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뒷문으로 갔다.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밖으로 나오는데, 맞은편 복도 창가에 서 있는 남자 뒷모습이 보였다. 세련된 사복차림의 남자……. 서지무. 고개를 돌려 지무를 본 서지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를 정면에서 보고 말했다. “잠깐 괜찮을까?” 아무리 들어도,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긴장해 버렸던 지무를 부드럽게 안정시키는 울림. 든든한 어른의 품에 안겨 있는 꼬마 아이가 된 심정으로 지무는 고개를 끄떡였다. “예.” “같은 나이인데 말 놓지 그래?” “…….” 도저히 그 말에 응할 수가 없었다. 강진 선배의 형님이라서? 강유 누님의 지무님이라서? ……아니다. 죄책감이다. 서지무의 더 없이 소중한 강진을 범해버린 강간범의 양심이다. 지무가 껄끄러워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앞서 걸어갔다. “일단 나가자.” “…….” 지무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강진을 따를 때와 같이 한 걸음의 거리를 두고 뒤에서. 그러나 신발을 갈아 신고 교문으로 걷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나란히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지무가 보폭을 좁혀 자신과 맞췄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무는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올려보았다. 선글라스는 목라인에 걸어 두었기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고스란히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자상하게, 온화하게 느껴진다. 눈동자가 부드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안정되고 고요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만만하게 느껴지는 쪽이냐면 그건 결코 아니다. 저런 분위기, 저런 모습 그대로 지애를 밟았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내 대리출석자였다고 들었어.” 교문을 나서며 서지무가 입을 열었다. “진이가 억지를 부렸다던데.” “아니요. 재밌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서? 따라 죽을 생각이었다고……. 유서까지 적어놨었다고 하던데.” “…….” 그건 지무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다. 어째서 함부로 참견하는 걸까? 신호등 앞에 멈춰선 서지무는 그제야 그를 내려보았다. “살고 싶지 않은 거니? 아니면 살아갈 길이 없는 거니?” “……살고 싶어요.” “그럼 후자구나.” 신호등이 바뀌었다. 하얀 정지선을 밟고 나가며 주위를 둘러본 서지무는 짧게 물었다. “배고프니?” “아니요.” 정확히는 허기를 느낄 정신이 없었다. “그럼 저기로 가자. 날이 춥다.” 서지무가 가리킨 곳은 커피숍이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서지무. 그래서 커피를 잘 끓이는 강진. 한때 열렬히 질투했던 그 구도를 떠올리며 지무는 피식 웃었다. 강유의 예법에 맞는 우아한 움직임도 강진의 절제된 움직임도 아닌, 그저 맛있게 커피를 마시는 서지무의 모습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먼저 밝혀두지.” 언 몸을 녹이며 커피를 기다리다가, 이내 내온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서지무는 입을 열었다. “난 내일 자퇴할 거다.” “…….” 놀랍지도 않았다. 역시나 그런가, 하고 다소 입 안이 써졌을 뿐이다. “넌 학교를 다니고 싶니?” “……예.” “내 대신으로 학교를 다녀봐야 소용없어. 졸업장은 내 몫이 되어버리니까.” “……알아요. 그래도 다니고 싶었어요.” 서지무는 더 말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묵묵히 삼분지 일정도 마시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네 이름으로 다니도록 해. 누구 대신이 아니라, 네 자신이 자기 명찰을 달고.” “…….”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가.지무는 한층 입 안이 써져, 커피 위에 올려진 휘핑크림을 스푼으로 떠먹었다. 그러나 서지무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편입 준비는 내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부터 그렇게 다니도록 해. 껄끄럽다면 다른 학교로 다녀도 괜찮고.” “……!” 지무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곤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 “다, 다녀도 되요? 제가요? 저 돈 없어요. 그리고 신세 갚으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먼저 폐를 끼친 건 내 쪽이잖니. 내가 지원할 테니 다니도록 해. 학교는 역시 다른 곳이 좋겠니?” “아니요!” 지무는 활짝 웃었다. “윤명고가 좋아요! 제게 선전포고한 녀석도 있는 걸요!” “선전포고?” “예! 제가 이번에 전교 8등을 했는데, 원래 8등인 녀석이……!” 기쁨과 흥분으로 말을 늘여놓던 지무는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항상 수석을 하던 수재가 아닌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격이 되어 버렸다. 서지무는 비웃는 기색 하나 없이 지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지무가 도중에서 말을 멈추자 혼자 생각에 잠겨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지무는 왠지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자신 몫의 커피를 홀짝였다. 빈 잔을 내려놓은 서지무는 종업원을 불러 리필을 부탁했다. 그리곤 새로 담겨진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나랑은 다르구나.” “……?” “내가 학교를 다닌 것은 진이 때문이었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초등학교까지 마치고 완전히 손떼려는데, 의뢰가 들어왔다. 자신의 아들을 보호해달라는 재벌가의 의뢰였지. 마침 나이대가 비슷한 내가 맡기로 했다. 보호해야 할 대상과 최대한 붙어있기 위해 중학교를 계속 다녔지.” “……의, 의뢰요!?” 지무는 영화 같은 이야기에 적응을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서지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 ‘의뢰’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지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그, 그럼 강진 선배를 그렇게까지 보호한 것은 단순히 의뢰 때문이…….” “의뢰 기간은 한 달. 진이를 위협하는 무리를 내쫓을 빌미를 찾기 위한 시간벌이였다.” 서지무는 피식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의뢰는 내가 진이를 만난 계기에 지나지 않아.” “아…….” 격하게 치밀었던 실망감과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서지무는 태연히 커피를 마시며 지무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나에게 있어 학교란, 나의 촉박한 시간을 잡아먹는 시간 도둑에 지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이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래서 중학교 때는 2년간이나 학교를 다녔다. 진이가 졸업한 뒤에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내가 진이와 행복하게 지내는 동안, 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다.” “입학하셨잖아요?” “진이가 입학선물을 준비해두었다는 소리를 강유가 해주었거든. 내가 학교를 포기한 상태에서 입학선물은 부담만 될 테니, 진이라면 내게 말없이 버리고 말테지. 헛되게 버리게 두고 싶지 않았어. 곧 자퇴할 생각이었다. 진이가 습격당한 일이 없었다면 그만 뒀겠지. 하지만 진이를 위험한 상태로 두고 나올 수는 없어. 결국 거의 일년 간 학교에 발이 묶여야 했다.” 지무는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누가 강진이 서지무를 보호한다고 했던가……. “뭘 해야 했기에 그렇게……?” “동생을 찾아야 했다.” 그때 서지무의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잔인하게 번뜩이는, 이미 피에 절어버린 검신이 검집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가 서서히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의 통제 하에서. “내 동생. 12년 전에 잃어버린 내 동생. 도둑맞아 버린 내 가여운 동생.” “…….” 지무는 좀 전에 옥상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 그 곁에 있어주고 싶다. “찾으셨군요.” “한달쯤 전에. 일본에서.” 그렇게 답하며, 서지무는 부드러우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지무는 아련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버린 게 아니었다. 동생을 찾아야 하는 데도, 강진과 함께 하기위해 의미 없는 학교를 다녔다. 강진의 마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생각도 없던 시험을 치러 입학했다. 그리고는 강진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감수했다. 버린 게 아니었다. 그 이상은 없을 정도로 사랑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 다시 말했다. “그 습격이 없었다면 벌써 동생분을 찾았을 텐데……. 그치요?” “아마도. 당시 실마리를 잡은 상태였으니까.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좀 다쳐버렸지만……. 못해도 반년은 단축됐겠지.” 서지무는 다시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날 있었기에 다행이야. 진이가 다치고 난 뒤면 늦어. 진이가 위험하다는 걸 모르고 해외로 가버렸다면 평생 나 자신을 저주했겠지.” “…….” 지무는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보다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물었다. “왜 제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요?” “진이의 마음을 내게 알려준 보답.” 강진의 마음만을 알고 안타까워한 지무를 자신의 마음도 알려줌으로써 안심시키고자 하는 것. 그것을 읽은 지무는 결국 실소하고 말았다. 역시 저 둘은 특별하다. 멋지다. 당해낼 수 없다. “넌 강해.” 두 잔째 커피를 다 마신 뒤 서지무가 말했다. 지무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지무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죽고 싶었다. 죽는 건 순간이니까.” “……!” “내가 죽지 않은 건 동생 때문이었어. 동생을 찾아야 했으니까. 내 가여운 동생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지.” 서지무는 지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넌 살고 싶다고 했다. 넌 강해.” “…….” 손에 쥐어진 찻잔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도 멍하니 서지무를 보던 지무는 경련하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양 옆으로 길게 찢어서, 웃음이라 불릴 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서지무는 강진처럼 사랑을 안다. 서지무는 지무처럼 고독을 안다. 그런 그가 지무에게 강하다고 말했다. 지무의 괴로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괴로움을 겪었을 그가 지무를 인정해 주었다. “당신은…… 멋져요.”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 아침이 됐다. 알람시계를 끄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폈다. 씻고 우유를 마시고 학교를 가야지. 학교! 똑같은 윤명고, 똑같은 1반, 똑같은 창가 맨 뒷자리.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지무의 것이다. 서지무라 새겨진 이 명찰도 드디어 지무의 것이 되었다. 기쁘다. 너무나 기쁘다. 지무는 얼른 씻고 우유를 마셨다. -딩동. “……?” 올 사람이 없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크게 소리쳐 물었다. “누구세요?” “누구긴 누구냐?” 호인이다! 얼른 문을 열자 바지에 두 손을 꽂고 느긋하게 서 있는 호인이 보였다. “어……. 너 왜 왔냐?” “하아?” 웬 뜬금없는 소리냐며 지무의 발목을 장난스레 걷어찬 호인은 얼른 준비하고 나오라고 했다. “이제 나 돌봐줄 필요 없는 거 아니었어?” “널 돌봐줄 필요야 애초에 없었지. 호위였잖아, 호위. 둔한 놈. 지애 선배가 널 완전히 포기하면 안 와.” “엥? 서지무가 왔는데 왜 날……?” “그게 복잡한 여심이라는 거다. 막말로 어제 그 소란에서 지애 선배가 건진 게 뭐 있겠냐? 본처 돌아왔고, 첩은 멀쩡하고. 딱 그 상황이지.” “우엑!” “쿡쿡.” 다시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진행되는 것이 기뻤다. 얼른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멘 뒤 나왔다. 나란히 걷던 호인이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내 폰 번호 아냐?” “어?” “쯧쯧. 내놔.” 지무의 핸드폰을 강탈해서 자기 번호를 꾹꾹 눌러, 알아서 저장까지 한 호인은 씩 웃으며 다시 건넸다. “하도 붙어 있다보니 이런 걸 잊네, 그래?” “…….” 액정화면에 두개의 전화번호가 보였다. 강진의 것과 호인의 것. 지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꾹 쥐었다. 교실로 가면 민수의 것도 저장해야지! “참! 나 어제 선전포고 받았다!” “선전포고? 서열에도 없는 놈한테 누가?” “하하! 그 선전포고 말고! 전에 전교 8등이었던 놈인데, 나한…….” 친구를 사귀자! 사귈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놈이나 건졌다. 제대로 된 친구는 한 사람도 많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겠지. 일단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고독을 메워 외로움에 지지 않게 되면, 그땐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을 배우자. 괜찮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지무의 짝도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무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강하다. 지무는 강하다. 여태껏 보아온 그 누구보다 강한 서지무가 인정해 주었다. 지무는 강하다! 지무가 살아가는 동안, 살아 있는 이상, 지무는 강한 사람인 것이다! *** 또르륵, 또르륵, 굴러가자. 또르륵, 또르륵. 또르륵, 또르륵, 내 자리 찾아서. 또르륵, 또르륵. -「박힌 돌 못 빼낸 굴러가는 돌」中 fin